▲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얼마 전에 가까운 친구가 `텔레그람`으로 동영상을 보냈다. 음악이 동반된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란 제목의 시와 윤동주 시인의 이름자가 들어 있었다. 우리가 아는 `서시(序詩)`의 시인 윤동주. 그런데 시 제목이 낯설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일찍이 윤동주 시인에 대한 관심이 남달라서 학부 1학년 시절 `윤동주 평전`을 탐독하고 그의 시편(詩篇)을 기억하곤 했다. 누군가의 표현에 따르면 “그 시절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시인들”이었으므로.

동영상 끄트머리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구절이 덧보태져 있었다. 오호, 이건 정말 아닌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텔레그람`으로 그런 생각을 전했고, 시를 전공하는 친구가 요즘 인터넷 상으로 떠도는 유령(幽靈)의 실체를 밝히는 블로그를 연결해줬다. 사달의 출처가 어딘지 모르지만, 누군가가 쓴 자작시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 윤동주의 시처럼 둔갑해서 가상공간을 떠돌아다닌 지 제법 된다는 것이었다.

다량의 지식과 정보가 인터넷으로 유통되는 첨단의 시대를 살고 있다지만, 이것은 지나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한국인이라면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윤동주 시인의 위작(僞作)으로 허름한 시편이 돌아다닌다는 것은 적잖은 슬픔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의 이태백이나 두보, 러시아의 아흐마토바, 일본의 마쓰오 바쇼, 영국의 바이런, 프랑스의 랭보, 이탈리아의 페트라르카를 참칭(僭稱)한 작품이 인터넷을 유령처럼 배회(徘徊)한다면 어쩔 것인가?!

1948년에 출간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31편의 시가 윤동주 시인이 남긴 거의 모든 시작품이라고 한다. 이준익 감독의 흑백영화 `동주`에서 사촌인 독립운동가 송몽규와 함께 살아난 아름다운 시인이 위작소동을 알게 되면 섭섭해 할 듯하다.

1917년 12월 30일에 태어나 1945년 2월 16일에 세상 떠난 시인 동주. 28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지상의 빛과 만났던 시인 윤동주. 그가 `인생의 가을` 운운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아니겠는가?!

해마다 6월 6일이 되면 러시아 전체가 축제로 들썩거린다. 러시아 국민문학의 아버지이자 최초의 계관시인 푸쉬킨의 탄생 기념일이 6월 6일인 때문이다. 유럽으로 열린 창(窓) 페테르부르크에서부터 태평양에 면한 캄차카까지 푸쉬킨을 기리고 추억하는 축제가 온종일 열리는 것이다. 러시아인에게 러시아어로 러시아의 영혼과 습속, 문화와 종교, 사유와 인식, 역사와 철학을 설파했던 푸쉬킨. 시와 소설, 희곡과 평론에 이르기까지 그는 러시아 문학 자체였다.

하지만 우리 한국인에게는 그런 시인이 없다. 시인이 없다는 말보다, 그런 시인을 기리는 한국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길거리에서 물어보라. 윤동주나 이육사, 김소월과 한용운 시인의 생몰연대 가운데 하나라도 알고 있는 한국인이 몇이나 되는지 확인해보라. 뭐, 그런 게 대수냐고 손사래 치는 분들이 많을 것은 불문가지. 하기야 부모형제의 생일이나 기일(忌日)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주류가 된 세상이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그럼에도 나는 특정종교와 결합하여 윤동주를 욕보이는 사람들이 언짢다. 사실관계조차 온전하게 파악하지 않은 채 인터넷으로 `인생과 가을`을 퍼 나르는 사람들이 우울하다. 그것은 한국의 대표시인에 대한 사랑과 존중에서 발원한 것이로되, 같은 이유로 그이를 훼손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가 진정으로 아끼고 기리는 시인이라면 그의 생애는 물론이려니와 작품 하나하나에도 관심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리라 믿는다.

선의(善意)로 보내진 동영상에서 뜨악함을 느낀다는 것은 우울한 노릇이다. 시와 문학이 사라져가는 차가운 세태에 시를 동반한 동영상 송출은 찬양받을 일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수능시험에 나오는 몇몇 시들만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는 남루한 세대가 조속히 소멸하고, 시와 시인을 가까이하는 털북숭이 인간들(자마틴의 소설 `우리들`의 인물들)의 조속한 도래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