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희룡<br /><br />서예가
▲ 강희룡 서예가

구차(苟且)라는 용어는 원래 구저(苟苴)에서 파생된 말이다. 후세로 오면서 풀초를 빼고 구차로 전한다. 구저란 신발 바닥에 까는 지푸라기를 말하는 것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되는 의인을 살리기 위해 천리 길을 가는데 그의 신발이 닳아서 발에서 피가 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너무나 애처로워 볏짚을 모아 그의 신발에 깔아주었다. 이 일을 보고 구차하다는 말은 `모멸을 감수하고 적은 동정을 받는다`는 뜻으로 안영(BC.578년 ~ BC.500)의 `잡상편`에 기록돼 있다.

구차함이란 버젓하지 않거나 번듯하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무엇이 구차함인가`하는 용어에 대한 경계는 경전의 여러 곳에 나타나는데, 그중 순자는 `영욕`에서 `살기에 급급할 뿐 앞날의 재앙을 알지 못하는 구차한 자들은 자기가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인지도 모른다`고 한탄했다. 또한 고대의 일상생활에 적용되었던 규범들을 수록한 자료인 `예기`의 `곡례편`에는 `재물을 대하여 구차하게 얻으려고 하지 말며, 어려움을 당해 구차하게 모면하려고 하지 말라`고 잘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 외에도 삶의 국면마다 이런 구차함에 대한 경계를 만나고 있다. 그래서 구차함을 없애야 하는 언행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으며 대개의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구차함이 무엇에 대한 구차함이냐에 따라 구차함을 피하려는 노력은 우리의 삶에 서로 다른 결과를 낳기도 한다.

예기의 그 무엇에 대한 구차함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밖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의식주와 같은 것이다. 이것에 대해 자신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번듯함만을 추구하는 것은 겉멋을 부리는 가식의 행위이다. 몇 평짜리 아파트가 나의 버젓함을 대표하는 것이 될 때 그 삶이 얼마나 초라하겠는가. 이런 것에 대해서라면 능력에 맞게 검소하게 생활하고 만족할 줄 알면 내면의 삶은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에게 요구한 것 즉 자신을 단속하며 소신을 지켜나가는 것 등에 대해 소홀히 하고 쉽게 만족할수록 자기계발은 요원해진다. 구차한 타협으로 인한 만족은 결국 자신의 삶마저 황폐하게 만든다.

조선후기 문신인 이시원(1789~1866) 선생은 `사기집, 구암설`에 `구차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면 구차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세상일이란 위에서 말한대로 그 구분이 확연하지 않은 때가 많다. 앞의 예기의 경계 중에 재물을 얻으려는 것에 대해 말하면 재물은 밖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지만 재물을 얻겠다고 자신과 약속한 일이라면 그 일은 또 나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구암설에서 어떤 일이 구차한지 않은지 논하기에 앞서 그 일을 마땅함의 저울에 올려보길 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구차함이 당당하게 대중들 앞에서 나서기 시작했으며 소위 지성인이란 사람들의 화법 속에 부끄러움 없이 들어박혀 있다. 수동태를 써서 자신의 생각이 아니고 다수의 생각인 것처럼 만드는 생존방식을 택해왔던 과거는 아직도 청산되지 못하고 살기 위한 현재진행형이다. 대표적인 예로 현 정부가 공약했던 고위공직자 임명에 따른 본인과 직계가족의 인사청문회 5대 비리 관련자 원천배제는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형국이 되어 이미 우리 사회구조가 수용할 수 없는 가치관이 된 것이다. 지난 정부의 한때 문체부장관이었던 인사가 국회 위증혐의에 대해 증인선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리적으로 무죄라고 주장하는 구차한 변명이나, 현재 국회청문회를 앞두고 있는 중소벤처기업장관 후보자의 미성년자인 딸에게 증여된 수십억을 비롯해 제기되고 있는 각종 의혹들을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는 행위는 결국 저지른 잘못보다 그 죄를 더욱 크게 만든다. 마땅함의 저울질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저울질을 거치면 구차함은 어느 측면에서든 더 이상 구애(拘碍)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