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봤다. 방송인 다니엘 린데만이 자신의 독일 친구들을 한국에 초대했다. 역사교사, 화학자, 연구원인 그들은 첫 이틀간 다니엘의 도움 없이 서울을 여행했다. 길을 헤매기도 하고, 음식 주문에 애를 먹기도 했으나 큰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대중교통 시스템, 치안, 공공서비스, 시민의식, 음식, 문화 공간 등 한국도 여행하기 참 좋은 나라라는 걸 방송을 보며 새삼 느꼈다.

독일인 친구들은 아침 일찍 DMZ 투어에 나섰다. 투어버스를 타고 파주 비무장지대와 휴전선, 도라전망대, 제3땅굴, 판문점, 임진각 등을 견학했다. 가이드로부터 한국전쟁과 분단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듣는 표정이 진지했다. 독일도 분단을 겪어선지 정서적 유대를 느끼는 듯 보였다. “우리는 통일이 된 것에 감사해야 한다”는 화학자 페터의 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걸음을 재촉한 다음 일정이 놀라웠다. 택시를 타고 서대문형무소 견학을 간 것이다. 독일 친구들은 일제강점기 한국사의 현장에서 숙연해졌다. 온갖 잔혹한 고문 방법, 신체를 구속하는 끔찍한 독방, 독립운동가들의 사진 등을 보며 일본의 만행을 비판했다. 일본이 일제강점기에 대해 외면하는 것은 잘못이며, 사과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독일은 지금도 과거사를 반성하며 항구적 책임으로 여긴다.

나도 모르게 “고맙다”고 혼잣말을 했다. 독일 친구들이 숙연해하고 분노할 때 우리는 무얼 하고 있었을까. DMZ 투어 버스에 탄 한국인은 가이드 한 사람뿐이었다. 오랫동안 들은 고리타분한 옛이야기 정도로 느끼는 지도 모르겠다. 일제강점기와 남북 분단은 너무 익숙해 오히려 제대로 아는 게 없다. 식민치하가 몇 년이었는지, 한국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 물으면 말을 뭉뚱그린다. 둔감도 아니고 불감이다. 입시에 목매게 하고, 편향 교과서나 읽게 하면서 교육에 소홀했던 기성세대와 국가 잘못도 크지만 스스로 바르게 알고자 노력해본 적 없는 무관심이 더 큰 문제다.

장교로 복무하던 시절, 친한 선배들을 최전방 강원도 양구로 초대했다. 1박2일 동안 나름대로 `안보관광` 가이드를 자처했다. 평화의 댐과 도솔산을 지나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 GOP 군사도로로 해발 1천242m 가칠봉 초소까지 올랐다. 미리 출입신청을 요청해 허가를 받고, 군복을 입은 내가 안내했다. 11월의 전방은 칼바람 가운데 적막했다. 철책 너머 북한군 초소를 보는 지인들의 눈빛이 깊었다. 전방 풍경에 감탄하면서도 마음 속 묵직한 먹먹함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비포장도로를 내려와 제4땅굴 견학을 하고 나오는데, 한 무리의 일본인 관광객들이 보였다. 가이드가 갑자기 내게 설명을 요청했다. 군복 차림에 다이아몬드 계급장 모자를 쓰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땅굴을 통해 대규모 병력과 무기가 짧은 시간 동안 서울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부터 북한군이 땅굴을 판 방식과 기간, 한국군이 땅굴을 발견해낸 과정 등을 설명했다. 가이드의 통역을 들은 일본인들이 박수를 쳤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나와 사진을 찍었다. 분단국가의 가장 삼엄한 경계에서 군복 입은 장교를 만났으니 그들에겐 진귀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내 주변 사람들은 양구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우리도 잘 찾지 않는 그 최전방까지 온 일본인들이 대단했다. 티브이로 독일 친구들의 여정을 보면서 느낀 것과 비슷한 고마움을 그때도 가졌던 것 같다. 여전히 진행 중인 한국의 아픔을 들여다본 독일 친구들은 다음날 경주로 가 우리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정말 멋진 여행이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추석 연휴가 꽤 길다.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면, 역사 및 안보 견학을 떠나보면 어떨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안중근기념관, 을지전망대, 제2땅굴 등 “어서 와, 여기는 처음이지?”라고 우리에게 손짓하는 곳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