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불난 집 문 부수고 불 꺼준 소방관에게 현관문과 소파를 변상하라고 한 정신 나간 집 주인 이야기를 들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아 기사를 찾아봤더니 사실이다. 화재 진압 및 인명구조 중 발생한 기물 파손 손해배상 요구가 지난 2년간 서울에서만 54건 접수됐다. 목숨 살리고 재산 지켜줬더니 감사는커녕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 인면수심(人面獸心)도 정도껏 해야 할텐데, 몰상식한 이기심과 천박한 돈 타령은 도대체 언제쯤 그치는 걸까.

동물도 자신을 구해준 존재에게 은혜를 갚는다. 때로 사람은 동물보다 못하다. 소방서에 찾아가 돈 물어내라고 발악하는 자들이 만약 `오수의 개` 주인이었다면, 죽다 살아 기력 없다며 개를 잡아먹었을 것이다. 은혜를 모르고, 감사를 모르고, 부끄러움을 모르면서 현관문과 목숨 중 무엇이 더 소중한지도 분간 못하는 사람들이다.

신께서 “네 마음이 번잡하니 꼭 필요한 두 가지 감정만 남겨두고 없애겠다”고 한다면, 나는 고마움과 미안함을 선택할 것이다. 감사하고 죄송할 줄만 알아도 남에게 해악 끼치지 않으며 살 수 있다. 십여 년 전 처음 유럽 배낭여행을 갔을 때, 영어 한 마디 할 줄 몰랐지만 `thank you`와 `sorry` 두 단어만 가지고도 큰 어려움 없이 다닐 수 있었다.

은혜 입은 고마움을 모르고, 잘못에 대한 죄책감을 금방 잊는 사람들은 대개 타인 없이 혼자 세상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누리는 것들이 타인과의 관계, 즉 사회라는 기반 위에서 상호성을 통해 얻는 것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도움을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기고, 내가 끼친 민폐는 `그럴 수도 있는 일`로 얼버무린다.

당장 소방관이 없다면, 경찰이 없다면,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다면, 농부들이 사라진다면 우리 삶이 어떻게 될까. 초등학생한테도 안 물어볼 질문을 던져야 하는 세상이다. 염치와 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런 나라를 만든 건지, 나라가 먼저 잘못된 본을 보이니 너도나도 그 비상식을 따라하는 건지 궁금하다.

소방관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한 사람들이나 세월호 구조에 나섰던 민간잠수사들을 고소했던 무능한 국가나 서로 마찬가지다. 선거철에 고개 숙이며 굽실거리다 선거가 끝나면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국회의원들도 똑같다. 자기들 밥그릇 챙기려고 한국 축구를 살린 영웅 히딩크 감독의 도움 제안을 걷어차 버린 축구협회도 있다. 길 알려준 이에게 고맙단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뻣뻣함, 차선 끼어들고 비상등 한번 켜지 않는 뻔뻔함 같은 일상의 몰염치와 무례함이 쌓이고 쌓여 `적반하장(賊反荷杖)`의 사회가 된 것일까.

시민의식이 바뀌려면 국가가 먼저 모범을 보여 변화를 선도해야 한다. 구조나 구급활동에서 발생한 기물 파손의 경우 시·도가 가입한 배상책임보험으로 처리가 가능하나 화재 사고는 보험 가입이 안 돼 소방관들이 사비를 들여 보상하는 일이 잦다. “파손되는 기물이 고급 승용차이든 대리석 기둥이든 피카소 그림이든 간에 국가가 다 책임질 테니 화재 진압에만 최선을 다 하라”는 약속을 소방관들에게 해줄 수 있어야 한다. 이웃을 위해, 공익을 위해 희생한 의인에 대한 포상 범위도 확대해 “내가 의로운 일을 하면 누군가는 반드시 보답해준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불 꺼준 소방관더러 소파 값 물어내라 했다는 집 주인 기사를 읽던 중, 강릉 석란정 화재 현장을 진압하던 소방대원 두 명의 순직 속보를 접했다. 우리가 그들에게 소파, 현관문, 화단, 빗물받이, 자동차 사이드미러 따위 값을 청구하는 동안 그들은 천금으로도 바꿀 수 없는 목숨을 바쳐 우리의 삶을 지켜주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이 두 마디 말은 인간 사회의 기본 언어다. 이걸 못하면 `인간 실격`이다. 그래서 다시 연습해본다. 고맙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