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재선 대통령으로 재임(在任)했던 오바마가 퇴임할 때 사진이 인상적이다. 8년 전 젊고 팽팽하며 여유로운 모습은 온데 간 데 없고 중늙은이가 그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허옇게 센 머리터럭과 코 양쪽에서 입술 주위로 내리뻗은 굵은 주름살. 햐, 누가 저이를 8년 전의 오바마라 생각이나 하겠는가. 8년 세월이 아무리 긴 시간이라 해도 사람이 저렇게 신속하게 늙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생각을 곱씹어도 무상(無常)을 넘어 혼란스러워진다.

무엇일까. 그이를 장년의 인간에서 중늙은이로 뒤바꾼 동인(動因)이 무엇이었을까. 지구촌 최고의 권력자 노릇 8년에 남은 것이라곤 노년의 돌이킬 수 없는 자취뿐이라니! 냉전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이런 문제가 제기된 적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직업은 무엇일까.”

1등은 강대국 대통령. 따라서 로널드 레이건과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0년대 가장 힘든 노역(役)을 지고 있었던 셈이다. 2등은 우주비행사. 영화 `인터스텔라`나 `그래비티`를 보신 관객이라면 이내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무중력의 시공간에서 언제나 죽음과 대면하면서 고독과 싸워야 하는 사람이므로. 3등은 영화감독. 다소 뜻밖일 것이다. 하지만 한 편의 영화에 내재한 허다한 공동 조력자를 생각한다면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배우, 음악, 의상, 분장, 미술, 소도구, 대도구, 진행, 스턴트, 편집, 선외 등등 영화를 가능하게 하는 각종 요소를 생각해보시라. 20세기를 대표하는 `제7의 예술`로 자리매김한 영화의 종합적인 성격을 고려한다면 감독의 어깨에 실린 하중을 실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 감독이 만든 영화를 우리는 어쩌면 너무 가볍고 값싸게 소비하는지도 모른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字幕)이 끝까지 올라가고 나서야 자리를 뜨는 관객은 거의 없으니 말이다.

연극과 영화를 사랑하는 내가 만든 말이 있다. “단역(端役) 없이 조연(助演) 없고, 조연 없이 주역(主役) 없다!” 결론은 단역배우가 없이는 어떤 주연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주연배우로 살아가고 싶어 한다. 그것이 개인사든 확장된 사회관계 내부에서든 우리는 버젓이 주역을 담당하고자 한다. 그저 무명(無名)으로 존재감 없이 묻히기는 싫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 양인자는 소리 높여 외친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수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하지만 인생이란 게 무슨 흔적 따위를 남기는데 의미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아주 미미한 흔적마저도 지워버리고자 진력한 법정 스님의 예화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다. 오바마의 주름살을 보며 떠올린 것이 주역의 고단한 행장(行狀)이었던 까닭은 그것이었다. 한 사람이 이고지고 견딜 수 있는 행장의 최종무게를 과도하게 측량-책정하고 실행한 후과(後果)로 남은 주름살. 하지만 그 알량한 `오바마 케어`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묻고 싶다.

후임자가 하나둘씩 폐기해가는 전임자의 정책에서 권력의 무상함과 헛심을 본다. 도로 아미타불로 전화(轉化)하는 지난 시대의 지난(至難)한 노력의 결실을 보며 오바마의 주름살은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허망함일까, 거꾸로 돌아가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대한 거부감일까. 그도 아니면 무망(無望)한 시도의 종언에서 풍겨 나오는 역겨움에 대한 구토일까. 여하튼 나의 명제는 단출하다. 주역이 되려는 어떤 시도도 상처와 아픔으로 남게 된다는 것.

단역의 단출함과 소소함이 선사하는 단아함과 아늑함이 새삼 따사롭게 느껴진다. 허다한 인구(人口)에 회자되는 짧고도 짧은 권력의 희롱과 농단이 야기한 기이하고 파괴적인 행각을 얼마 전 우리는 생생하게 목도하지 않았던가. 하되, 다수의 인간은 여전히 주연배우로 무대를 휘젓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 잊지 마시라. 그대들을 위한 숱한 단역과 희미한 조연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그대들을 가능하게 했다는 자명한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