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시와 시인들은 학부 때 나를 길러줬다. 윤동주, 이육사, 서정주, 김수영 같은 시인들과 그이들을 다룬 평전(評傳)을 읽곤 했다. 생택쥐베리의 `어린 왕자` 영역본도 유쾌한 동반자였다. 몹시 암울한 시절이었기에 술과 정담(政談)이 빠질 수 없었다.

내가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를 통째로 외우는 일이었다. 시를 기억함은 시인의 영혼과 정신을 온전하게 흡수하는 일이었고, 그의 언어와 기법을 내 소유로 치환하는 일이었다. 일찍이 공자는 세상에 떠돌던 3천여 편의 시 가운데 305편을 모아 `시경`을 편찬했다.

논어 `위정 편`에 “시 삼백 일언이폐지 왈 사무사(詩 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 하는 구절이 있다. `시경`에 들어있는 300편의 시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그 생각에 사특(邪慝)함이 없다! 그런 말이다. 시에 마땅히 담겨 있어야 하는 본질을 간명하게 통찰한 명구(名句)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깨달음에 기초하여 공자는 시를 완전하게 기억해 체화해야 한다고 믿었던 듯하다. 일컬어 `불학시 무이언 (不學詩 無以言)`이라 한다.

진강과 백어 사이에 있은 대화의 핵심은 `시를 공부하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으로 요약 가능하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을 책임지는 언어의 제1과 제1장을 공자는 시에서 찾은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상대방의 사유를 이해하는 방편(方便)을 시에서 구했던 공자. 공자의 외아들 백어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시를 공부한다. 시를 공부함은 당연히 `시경`의 시를 암송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일이다.

이런 내용은 훗날 논어를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도 시는 기억해야 제 맛이 우러난다고 가르쳤던 선생이 있었다. 고려대 국문학과에 재직했던 소설가 정한숙 교수가 그이다. `소설 기술론`을 가르쳤던 그분은 우리에게 시는 반드시 통째로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인이 운용하는 시어와 기교를 사계(四季)의 전변(轉變)과 함께 비교-성찰하면 자신의 언어와 사유가 풍성하고 깊어지리라는 것이 그분의 지론이었다.

어찌 됐든 나는 시를 기억하고 암송하기를 즐겼던 학생이었다. 어렵고 깊이 있는 철학이나 사회과학에 흥미를 가지지 못했던 터라 시인들의 선물에 크게 공감했던 것이다. 지금도 한시를 포함해 대략 30여 편의 시를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윤동주 평전`을 읽다가 20대 초반 동주의 깊이 있는 성찰에 감읍(感泣)한 적이 있다.

당시 연희전문이 자리했던 서강벌과 동대문 사이를 왕복하던 전차를 타고 느낀 소회(所懷)를 담은 `시는 종이요, 종은 시`라는 글이 그것이다. 시인은 특별한 일도 없이 전차의 시발역인 서강벌에서 전차를 탄다. 전차의 종점인 동대문에서 내리지 않고 앉아 있다. 그러면 이번에는 종점인 동대문이 시발역이 되고, 시발역이었던 서강벌이 종점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어낸 것이 `시는 종이요, 종은 시다`라는 구절이다.

스물을 갓 넘긴 동주가 도달한 깨달음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도덕경`의 `전후상수(前後相隨)`를 연상케 하는 구절이다. 앞과 뒤가 서로 따른다는 의미인데, 양자의 교체를 단순 명쾌하게 해명한 것이다. 앞이 뒤가 되고, 뒤가 앞이 된다는 함의(含意)다. 노자는 그런 식의 변증법적인 사유에 능통했던 인물이다. 상호 모순적인 대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연결하여 이항 대립하는 양자의 동시성과 공존을 강조한 인물이 노자 아닌가.

한국시의 철학적 엷음을 한탄하는 이에게 나는 젊은 날의 동주가 통찰했던 `시는 종이요, 종은 시`라는 구절로 응대하곤 한다. 소중한 것은 어쩌면 우리 가까운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