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두 주에 한번 꼴로 영화를 본다. 범물동에 있는 `가락 스튜디오`에서 두 번째, 네 번째 수요일 저녁에 시민들과 함께 영화를 본다. 벌써 몇 년째 지속해온 행사다. 영화를 보는 구성원들은 그날그날 다르지만 커다란 얼개에서 보면 잘 아는 면면이 주축이다. 처음 보는 사람이 모임에 나타나는 일도 있지만 이쪽의 친숙도와 정치적 입장의 선명성 때문인지 이내 자취를 감추곤 한다. 아직도 낯을 가리는 수줍은 시민들이 적잖다.

“영화를 보는 이유가 뭡니까?” 부지불식간에 내가 던지는 질문이다. 돌아오는 대답은 대개 일정하다. 평균적인 한국인들의 범용한 일상의 일부가 된 영화보기. 그래서일까? 관객들이 도달해있는 영화 관람수준은 상당히 높다. 전혀 예기치 못한 지점을 포착하는 사람도 있고, 아주 독특한 텍스트 해석을 제기하는 이도 있다. 나는 민주와 평등을 중시한다. 누구라도 한번쯤은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기회를 반드시 제공한다.

언어의 독점은 권력이나 금전 혹은 명예의 독점처럼 그 폐해가 우심하다고 나는 판단한다. 저마다 다른 입장을 가감 없이 전하고, 그런 과정에서 공감과 유대가 생겨난다고 믿는다. 그런데 누군가 자신의 견해나 관점만 주구장창 읊조린다고 생각해보라. 그것은 무한폭력의 변주와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2천500년 전 지식인 공자의 사유와 인식은 음미할 만하다.

“공자는 네 가지를 하지 않으셨다. 남의 생각을 넘겨짚는 일, 무엇인가를 꼭 관철하려는 것, 고집을 부리는 것, 자신만 내세우는 것을 하지 않으셨다(子絶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 `논어` 가운데 `자한편子罕篇)`에 나오는 구절이다. 공자처럼 위대한 사상가이자 철학자이며 교육자도 홀로 마이크 잡고 거룩한 얘기를 주절주절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이는 품이 너르고 깊었으리라.

영화를 둘러싼 이야기를 나누다가 누군가 불쑥 한국정치 얘기를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화급하고 단호하게 그런 얘기의 허리를 잘라버린다. 영화감상의 흐름을 끊을 뿐 아니라, 모임의 성격마저 모호하게 하기 때문이다. 기실 영화보기 모임에 나오는 사람들의 성향은 대개 진보연하는 인사들이 주축이다. 따라서 한국정치의 현황이나 미래기획을 함께 사유하는 행위는 불필요한 과제다. 시간과 공력을 들여 사족을 달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는 영화와 관련된 생각이나 인식을 공유하고 난 다음에 하자는 얘기다. 같은 시공간에서 영화를 보았으면 영화와 관련한 이야기가 응당 주가 돼야 한다고 믿는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 사람들 가운데 이렇게 특별한 경험을 공유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 까닭이다. 이런 인연으로 엮인 사람들의 소소한 생각도 의미 있다고 나는 믿는다. 누가 알겠는가? 언젠가 그런 생각의 단편(斷片)들이 우리를 평안하고 넉넉한 사유의 바다로 인도할 줄을!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고 수미일관하게 전달하는 행위는 지적(知的)인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생각과 언어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일은 작지 않은 축복이다. 누구나 나름의 사유나 인식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런 작업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낯선 사람들이 영화보기 모임에 왔다가 시나브로 불참하는 까닭은.

한 달에 두 번 가지는 모임이 더러 귀찮아질 때도 있다. 낯익은 얼굴과 언어와 생각에 지쳐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영화보기 모임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은 허다한 인총들의 노고를 떠올리곤 한다. 그분들의 땀과 눈물과 한숨과 경탄과 소주와 밤샘을 생각하면 영화를 본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한 편의 영화를 보러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