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선애 대구가톨릭대 교수·한국어문학부
▲ 임선애 대구가톨릭대 교수·한국어문학부

우리는 현재 IT강국에 사는 국민답게 실시간으로 온갖 뉴스들을 접하고 있다. 뉴스거리는 그 특성상 이전과는 다르고, 일상의 평범함을 넘어서는 무엇이어야 하기 때문에, 진한 감동과 놀라운 충격이라는 극한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다.

기사들을 보면, 진한 감동을 주는 선행보다는 놀라움을 금치 못할 충격적인 악행들이 훨씬 많은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그렇다. 아무리 충격적인 기사가 많다고 해도, 우리의 일상은 악함보다는 선함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비교적 안정적으로 굴러가고 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차마 하지 말아야 할 충격적인 사건들의 잦은 보도는 우리를 매우 걱정스럽게 만들고 있다.

걱정과 함께, 선함과 악함의 문제를 별개로 두고,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도 한다. 메리 셸리 여사가 쓴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SF소설이다. 이 소설은 신이 되려고 한 인간과 인간이 되려고 한 인조인간의 대립, 과학기술의 실패가 초래하는 재앙을 경고하는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다. 소설의 내용 중에서, 인조인간인 괴물은 인간으로 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인간의 모습으로 탄생했지만,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이 텅 빈 상태인 그가 하는 노력들은, 인간들에게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생명을 불어넣는 비밀을 알아낸 젊은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은 시체 조각을 모아서 새로운 생명체를 만든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만든 생명체에게서 혐오감과 두려움을 느끼고 `괴물`이라고 칭하며 방치한다. 창조자로부터 버림받은 괴물은 자신을 그런 추한 모습으로 만들어낸 창조자를 원망하고 저주하기도 하지만, 인간들과 어울릴 수 있는, 인간 사회에 녹아들 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한다.

이리 저리 떠돌면서 감각을 익히고, 어느 오두막에 사는 가족들로부터 존경심, 사랑스러움, 다정함, 감동 등의 감정을 느끼고, 언어 사용법을 연습하는 등 인간 사회에 동화되기 위한 그의 노력은 감동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실낙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을 읽고 느낌을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작품들을 비교하기도 한다. 더구나 그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목적지는 어디인가`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변화를 보이는 존재가 되기까지 한다. 그는 인간 성장의 과정을 축약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추한 모습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그를 혐오하고 해치려고만 하기 때문에, 괴물은 자신의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인간사회로 진입할 수 없게 된다. 실패 이후 그는 잔인한 살인마의 삶을 살게 된다. 그의 비극적인 일대기는, 인간 아닌 종이 인간이 된다는 것,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과정과 나름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도 좀처럼 인간으로 살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다.

애초부터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는 어떤가. 인간으로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최근 들어 부모가 자식의 생명을 빼앗는, 자식이 부모의 생명을 빼앗는, 무작위로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비극적인 보도들이 잇따르고 있다. 이는 인간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극한을 넘어선 행위들이다. 인간이란 누구인가. 수많은 생물 중에서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우리는 만물의 영장으로, 생각할 줄 알고, 생각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살고 있다. 우리는 삶에 대한 경건한 마음, 삶의 소중함, 삶의 가치들을 되씹고 음미하는 존재들일 때 비로소 인간으로 살 수 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 그저 방심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고도의 긴장감이 필요한 어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