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논어`에서 가장 기막힌 구절 하나 꼽으라면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아닐까 한다. 중니(仲尼)처럼 도에 가까이 있던 사람이 저런 객기를 부렸다는 것은 그만큼 도를 구하기가 어려웠다는 반증일 것이다. 주(周)의 법도가 다하고 천하가 100여 개의 나라로 쪼개져 할거하던 시기에 도를 구하여 예악세상을 실현하려 했던 공구(孔丘). 그러나 어느 권력자나 제후도 그를 등용해 부국강병의 길을 꾀하지 않는다.

공자의 도는 시대와 불화하여 머나먼 과거의 신기루로 받아들여졌던 탓이다. 그는 이미 35세에 제나라 경공에게 “군군 신신 부부 자자” 여덟 글자로 정사(政事)의 요체를 갈무리했던 천재 아니었던가? `군왕이 군왕답고, 신하가 신하답고, 아비가 아비다우며, 자식이 자식다워야 비로소 국가의 정사가 온전해지리라` 믿었던 총명한 청년재사 공구. 하지만 그의 도는 500년 전 사라진 서주의 예악에 기초한 번문욕례와 다름없는 누추한 것이었다.

그가 인생말년에 도를 찾아 혹은 그의 도를 받아줄 군왕을 찾아 천하를 철환했던 이야기는 가히 눈물겨운 것이다. 온갖 냉대와 죽을 고비와 모욕을 견디고 길에서 길을 떠돌며 자신의 도를 갈파했던 중니. 하지만 10여 년의 세월 끝에 그를 찾은 것은 허무와 노쇠와 향수병이었다. 그가 환갑 나이에 황하를 건너려다 순화와 두명독 같은 선비가 조간자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전갈에 씁쓸해했던 장면은 가슴을 저미게 한다.

“흘러가는 것이 이 사내와 같도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구나.” 도도하게 흐르는 황하를 바라보며 장탄식을 내뱉는 인간적인 공자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장면. 결코 돌아오지 못할 강물처럼 사라져버린 청춘과 경세제민의 열망이 한숨과 백발과 상념으로 허공중에 스러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중니는 길에서 길을 찾아 헤매고 다시 헤맨다. 누구 하나 불러주는 이 없어도 그이는 오늘도 내일도 그 길을 간다. 그것만이 유일한 출구인 것처럼.

일찍이 푸른 소를 타고 함곡관을 지나 서역(西域)으로 사라졌다는 노자를 돌이킬 때 공자의 삶은 신산했지만 의지적인 것이었다. 세상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고, 나 역시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는 깨달음에 숨어버린 노자. 그가 내세운 덕목은 “자애로움과 검약함 그리고 천하를 위해 나서지 않음”이었다. 특히 마지막 구절은 공자와 지극한 대비를 이루면서 깊은 울림을 준다.

그런 점에서 저잣거리에 숨어 살았던 모순적인 인간 장자의 소회(所懷)는 뜻밖이라 할 것이다. “지금은 온천하가 미혹되었으니 내가 향도한들 어찌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줄 알면서도 힘쓰는 것은 또 하나의 미혹이다. 고로 포기하고 추구하지 않음만 못하다. 허나 추구하지 않으면 누가 진실로 더불어 걱정할 것인가.” “미혹된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추구하지 않는다면 무슨 다른 방도가 있겠는가” 하는 장자의 일갈.

이렇듯 다르고도 같아 보이며, 같으면서도 다른 그들의 길은 오늘에도 적잖은 가르침을 준다. 죽음마저도 마다하지 않고 길에서 길을 찾아 길을 떠돌았던 실천가 공자. 그런 길이 완전히 막혀있음을 확인하고 홀연히 자취를 감춘 노자. 세상과 교유(交遊)하면서 그 세상을 비웃되, 세상의 구원과 민중의 안녕을 희구했던 장자. 춘추전국시대의 고단한 삶을 곡진하게 드러내 보였던 시대의 거인들이 보여준 행장(行狀)의 의미는 여전히 퇴색하지 않았다.

노신은 “걸어가면 길이 된다!”고 썼다. 하지만 그 길이 고단하고 신산하며 더러는 출구마저 봉쇄된 지경이라면 그런 외침은 공염불이 되기 십상이다. 문제는 시간과 공간과 인과율에 의지하여 명민하게 시대의 징후와 변화의 전조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정진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하나 혹은 둘의 밝은 도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두루 공유하고 기꺼이 나누면 될 일이다. 그런 까닭에 오늘도 우리는 길에서 길을 찾으며 길을 떠돌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