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해마다 가을이면 나는 학생들에게 세계문학을 읽힌다. 교양 교과목으로 여섯 가지 문학작품에 기초한 영화를 강의하는 까닭이다. 나의 방점은 어디까지나 문학에 찍힌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과 `덤불 속`, 나쓰메 소세키의 `풀 베개`, 셰익스피어의 `햄릿`, 위고의 `레미제라블`,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에코의 `장미의 이름`, 파스테르나크의 `지바고 의사`가 내가 선택한 문학작품 목록이다. 거명한 작품들을 모두 읽으면 대략 5천 페이지 남짓일 듯하다. 독서량이 적지 않고, 거기 내장된 작가들의 인식과 사유의 깊이와 너비가 도저하여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일본 근대문학의 문을 연 두 사람의 작품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들이 인식하고 수용한 서양의 근대와 일본 지식인의 자세다. 명치유신이 결과한 서구적인 것의 일방적인 수용에 대한 소세키의 저항과 슬픔은 의외로 골이 깊다. 그에게 2년 남짓 사사(師事)한 류노스케의 천재성은 익히 알려진 것이다. 그러하되 동일한 살인사건을 바라보는 엇갈린 시선에 대한 통찰은 21세기 관점에서도 놀랄 만큼 유효하다.

희곡을 읽는다는 것은 적잖은 고역이다. 무대에 익숙하지도 않거니와 극장에 자주 가지도 않는 한국 학생들에게 희곡이라니?! 그래도 서양연극의 대명사 셰익스피어의 대표작을 찬찬히 음미하는 일은 작은 축복이라 여긴다. 자연 과학도이자 신실한 기독교도이며, 아버지를 흠모한 자식이면서 동시에 거트루드를 사모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소유자 햄릿. 그가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굽이굽이마다 넘쳐나는 의혹과 죽음의 그림자들.

프랑스 대혁명이 경과한지 한 세대에 이르는 시점의 억압받고 학대받은 인간 장발장의 내면세계를 외부사건과 대비해 그려내는 불후의 대작 `레미제라블`. 위대한 역사적 사건 발발에도 실제적인 현실변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비극적인 모순의 희생자. 그러나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멈추지 아니하고 성장-변화하는 장발장의 면모는 감동적이다. 더욱이 소설에 탑재된 위고의 정치적 신념의 양가성(兩價性)은 흥미진진하다.

세상을 살아가는 두 가지 방식을 대비함으로써 우리의 인생행로를 묻는 `그리스인 조르바`. 대지에 배를 대고 온몸으로 기는 뱀(조르바)과 정착을 모른 채 허공을 날아다니는 새(오그레)로 구현되는 민중과 지식인의 대비. 카잔차키스는 전자의 손을 들어주지만, 그 역시 후자의 고뇌와 사유를 고타마 싯다르타의 깨달음에 의지한다. 결국 인생사란 경험과 인식의 대차대조표 상에 존재하는 인과율의 결과일지도 모를 일이므로.

20세기가 낳은 천재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기막힌 전제(前提)에서 출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웃음과 희극에 대해 쓰지 않았을까?!” `시학`의 주안점은 비극과 서사시의 대비와 양식의 특징, 양자의 가능성과 한계서술에 있다. 아리스토파네스라는 걸출한 희극작가가 있었음에도 `시학`의 지은이는 왜 웃음과 희극을 제외했단 말인가. 거기서 파생되는 연쇄 살인사건을 당의정 삼아 웃음의 본질을 추적하는 소설 `장미의 이름`.

사회주의 10월 혁명과 그로 인한 내전시기를 살아가는 섬세한 감수성의 시인이자 의사인 지바고의 복잡다단한 인생살이를 그려낸 파스테르나크.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 앞에서 혼비백산한 인간군상과 그것에 마주해 사랑과 통찰로 시공간을 측량한 지식인 지바고. 그것을 시종일관 가능하도록 인도하는 시와 사랑의 풍요롭고 고통스러운 인과관계. 혁명기를 살아가야 했던 지바고의 신산(辛酸)할 정도로 고단한 행장(行狀)의 기록 `지바고 의사`.

이 모든 것에 유일한 공통점이 있으니, 그것은 `사랑의 이름으로`다. 이들 작품에서 사랑을 제외한다면 아마도 허명과 허세와 지적 허영만 남지 않을까. 하여 말하노니, 독자 제현이여, 오늘도 치열하게, 마치 당신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사랑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