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돈 순교와 불교왕국의 태동 ⑥

▲ 6세기 이전에도 신라에는 거대 규모의 절(가람)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칠처가람(七處伽·일곱 군데의 큰 절)은 이를 증명한다. 그중 한 절터에서 출토된 `사자 무늬 문고리`.

마르크스주의(Marxism)에 입각해 세계와 인간을 해석한 학자들은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지적 노동에 종사하는 지식인)를 “진짜 적이 아닌 논쟁의 적만을 혐오하는 인간”이라고 말했다.

그들의 그런 인식은 “피상적으로 세상을 보는 인텔리겐치아가 아닌 삶의 구체성과 실물성(實物性)을 획득하고 있는 노동자가 세계 변혁의 주체”라는 이데올로기를 낳았다.

아리스토텔레스(BC 384~BC 322)와 플라톤(BC 427~BC 347) 등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소피스트(Sophist)`를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철학적 관점을 배제한 채 `말장난`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을 일삼는 대중의 적”으로 규정했다. 우리가 요즘에도 사용하는 단어 `궤변론자`는 그때 나온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무언가`가 변화할 때는 언제나 논쟁과 논란이 있었다. 신라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믿어온 `토속신앙`과 신흥종교인 `불교`가 상호 대립적 관계를 형성하던 6세기 초반 역시 그랬다.

마르크스주의 학자들과 인텔리겐치아의 갈등, 플라톤과 소피스트의 언쟁 유사한 싸움이 거의 매일 법흥왕이 통치하던 신라왕실에서 벌어졌다. 이차돈의 순교가 있었던 527년 즈음이다.

“흩어진 국론을 하나로 모으고 미래를 바라보자”는 법흥왕과 이차돈, “전례(前例)와 이제껏 이어져온 전통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다”는 귀족들 사이의 입장 차이는 컸다.

왜냐? 거기엔 “왕에게 내가 가진 권력을 허망하게 내줄 수 없다”는 귀족계급의 절치부심(切齒腐心)과 “귀족의 권한을 왕에게로 일원화해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법흥왕의 욕망이 첨예하게 대립했기 때문이다.

▲ 법흥왕이 통치하던 6세기 초반 신라. 귀족세력은 토속신앙을 버리고 불교를 공인하려는 왕과 이차돈에게 저항했다. 당시 왕궁에선 이와 관련된 논쟁이 자주 벌어졌을 것이다. 한여름, 태양이 쏟아내는 열기보다 뜨거웠을 그 `설전의 현장`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br /><br />삽화/이건욱
▲ 법흥왕이 통치하던 6세기 초반 신라. 귀족세력은 토속신앙을 버리고 불교를 공인하려는 왕과 이차돈에게 저항했다. 당시 왕궁에선 이와 관련된 논쟁이 자주 벌어졌을 것이다. 한여름, 태양이 쏟아내는 열기보다 뜨거웠을 그 `설전의 현장`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삽화/이건욱

▲ 기존 이데올로기 대체할 `새 이데올로기` 필요성

2016년 12월 경상북도가 발간한 자료집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제4권은 `법흥왕-이차돈 vs 신라 귀족계급`의 논쟁을 아래와 같이 해석하고 있다. `불교의 공인과 융성`이란 챕터를 통해서다.

“동일한 고대국가라도 내부적으로 끊임없이 진화·발전하는 과정을 겪게 마련이다. 지배체제를 새롭게 재구성해가면서 그에 걸맞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수용하거나 만들어내 포장하려는 데에 계속해서 힘을 쏟는다.

신라도 4세기에 출범한 이후 기존의 체제와 지배질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한동안 최고 지배자를 하늘과 직접 연결시켜온 전통적 방식의 신앙과 지배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활용하였다.”

위의 서술은 법흥왕 이전의 신라의 종교가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왕은 그 사회에서 어떤 지위에 있었는지 말해준다. 이를 좀 더 구체화해 간명하게 설명해준 이는 경주학연구원 박임관 원장이다.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 신라인들은 강림한 조상신을 믿거나 시조 묘에 제사를 지냈으며, 삼산오악(三山五岳)과 같은 명산대천과 천지신명(天地神明)을 섬기는 토속신앙에 경도돼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불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구체제`의 대표 귀족과 불교 공인을 통해 `새로운 체제`를 원하던 법흥왕과 이차돈.

6세기 신라의 왕궁에서 진행된 `종교 논쟁`은 현대사회 한국의 여야 정당 사이에서 오가는 논쟁이나 설전보다 그 뜨거움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랬기에 사람의 목숨까지 오갔다. 바로 “목이 잘리자 몸통에서 흰 젖이 솟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이차돈의 순교다.

앞서 언급한 자료집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는 1천500여 년 전 벌어진 그 `논쟁과 설전`이 마무리되는 과정까지를 약술(略述)하고 있다.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지배체제가 자리를 잡게 되자 국정 안팎을 단장할 필요성도 생겨났다.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갖는 효용성이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에 대체될 만한 고급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였으니, 그게 바로 불교다.”

위에서 말하는 `기존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박 원장이 지목한 강림 조상신이나 천지신명을 섬기는 신라의 토속신앙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6세기 신라에서의 불교란 역사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듯 종교 이상의 의미를 가진 국민화합의 사상이나 왕조의 통치이념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 그 옛날 신라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경주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는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이다. 안개 낀 새벽. 그곳을 거닐면 법흥왕과 이차돈의 목소리가 들릴 듯하다.
▲ 그 옛날 신라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경주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는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이다. 안개 낀 새벽. 그곳을 거닐면 법흥왕과 이차돈의 목소리가 들릴 듯하다.

▲`왕권 강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불교 공인

신라 역사 연구자들의 보편적 견해에 힘을 보태는 또 하나의 논문이 있다. 바로 세명대학교 이창식 교수의 `이차돈 유산의 가치와 현대적 계승`이다.

이창식 교수는 신라의 불교 공인이 어려웠던 이유로 “귀족들의 폐쇄성과 재래적 토속신앙의 강고함”을 지적하며,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의 변화를 “정치체제에서 왕권의 강화 과정과 함께 이해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차돈과 법흥왕을 단순한 주종(主從)관계가 아닌, `불국토(佛國土) 신라를 만들기 위한 비밀스러운 프로젝트`의 상호협력자로 보는 학자와 역사소설가가 적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사회를 지배하는 정치 이데올로기의 변화 과정에선 새로운 이념을 위한 `희생양`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걸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몇몇 학자들은 “이차돈은 스스로 희생양이 되기를 법흥왕에게 읍소했을 수도 있다”고 한다. 죽음을 자청하다니…. 일반의 상식으론 쉽사리 이해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궁금증은 다시 증폭된다. 정말이지 스물한 살 청년 이차돈은 “신라의 발전과정에서 분화되고 복잡해진 사회를 일원적으로 포괄하는 한 차원 높은 규범과 이를 뒷받침하는 지배 이념인 불교”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던졌던 것일까?
 

▲ 이차돈과 법흥왕이 살던 시대 신라인들이 만든 말안장 장식. 1천500년 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미려하다. <br /><br />사진/이용선기자
▲ 이차돈과 법흥왕이 살던 시대 신라인들이 만든 말안장 장식. 1천500년 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미려하다. 사진/이용선기자

경주시 탑동 남산 `남간사터`

화려하게 꽃피었던 불교의 역사
황량한 벌판 당간지주는 기억할까

지난날의 기억이나 과거의 흔적을 찾아가는 행위는 흥미롭지만 쓸쓸한 일이다. 백 년을 계속해 화려한 영화를 누리는 사람은 없고, 제아무리 빛나는 왕국도 언젠가는 시간의 먼지 속으로 사라진다. 역사는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차돈의 순교와 법흥왕의 치세(治世)를 통해 꽃핀 불교문화 속에서 수백 년 이상을 번성한 신라왕조. 하지만 떠오름의 날이 있다면 가라앉음의 시간 또한 언젠가는 다가온다.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함으로써 신라의 `공식적 역사`는 끝이 난다. 영토 곳곳에 부침(浮沈)의 흔적만을 남긴 채.

경주시 탑동 남산 서쪽 언저리에 위치한 `남간사(南澗寺) 터` 역시 바로 이 부침의 신라 역사 한가운데 서 있다.

오릉(五陵)을 지나 35번 국도를 타고 가다 보면 좌측에 좁은 시멘트길이 보인다. 농로로 사용되는 그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남간사 터가 있다. 지금은 논으로 변했지만, 신라시대엔 거대한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그곳에 우뚝 선 3.6m의 구멍 뚫린 거대한 두 개의 돌기둥은 보는 사람을 현재에서 과거로, 현실에서 초현실로 순식간에 이동시킨다. 바로 보물 제909호인 `경주 남간사지 당간지주(慶州 南澗寺址 幢竿支柱)`다.

학연문화사가 출간한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 등에 따르면 남간사지 당간지주는 동서로 70cm의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두 지주 사이 당간(법회 등의 행사가 열릴 때 사찰의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은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 경주 탑동 남산 자락에서 만난 `남간사지 당간지주`. 인적 드문 벌판에 외롭게 서 있는 모습이 몰락한 왕조의 쓸쓸함을 떠올리게 한다.
▲ 경주 탑동 남산 자락에서 만난 `남간사지 당간지주`. 인적 드문 벌판에 외롭게 서 있는 모습이 몰락한 왕조의 쓸쓸함을 떠올리게 한다.

이 당간지주가 만들어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역사학계에선 8세기를 전후해 세웠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른 당간지주와 달리 십(十)자형의 구멍이 기둥 위쪽에 뚫려 있는 게 특징이라고 한다. 당간지주를 통해 거기에 상당한 규모의 절이 있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는 남간사 터. `삼국유사`에 의하면 남간사는 문무왕(신라 30대 왕·재위 661~681)이 통치하던 시절 자신의 몸을 망치면서까지 불법(佛法)을 얻고자 했던 당나라 유학승 혜통(惠通)의 집이 있던 곳에 창건된 절이라고 전한다.

남간사는 `순교자 이차돈`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찰이다. 헌덕왕(신라 41대 왕·재위 809-826) 때 이 절의 승려였던 일념(一念)이 “염촉(이차돈의 다른 이름)이 자신의 몸을 던져 불교를 받아들이길 청하였다”는 내용을 담은 `촉향분례불결사문(燭香墳禮佛結社文)`을 지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남간사 터에는 일념의 흔적도, 그 옛날 이차돈의 모습을 확인할 유물도 남아 있지 않다. 그저 황량한 벌판에 기이한 풍경으로 선 당간지주만이 세월의 바람을 무방비로 맞고 있을 뿐.

해가 질 무렵. 남간사 터 인근 저수지를 걸었다. 언뜻언뜻 물 위에 비치던 긴 그림자는 혹, 이차돈과 일념의 영혼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을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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