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길들인다는 말은 `어린 왕자`에서 자주 회자된다.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이고, 관계를 맺는 것은 시간과 정성을 쏟는 것이며, 그것은 책임으로 귀착된다. 길들임은 책임지는 행위가 된다.

소중하고 의미 있는 대상을 향한 모든 시간적 정신적 물질적인 행위의 종착점은 책임이다. 한국 사회에서 책임의 최종 탄착지점은 언제나 가문이었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는 조국과 민족 역시 대수롭지 않은 존재였다.

1907년 13도 연합의병 총대장 이인영의 경우가 그러하다. 국권회복을 위해 한양으로 진군하여 일군과 교전하다 패퇴하여 전열을 수습하던 그는 1908년 1월 28일 부친상을 당한다. 이인영은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허위 군사장에게 군무를 위탁하고 문경으로 향한다. 삼년상을 치르고 나서 의병에 합세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우리는 그 결과를 안다. 이인영은 1909년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그해 9월 20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한다.

누란지위(卵之危)의 화급한 상황을 보고도 삼년상의 효를 다하고자 했던 이인영. 일본군은 조선의 연합의병 총대장의 그런 행위를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국가 혹은 국가주의를 위해 몸을 버린 일본의 근대 지식인들은 부지기수다. 그것은 참혹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대동아전쟁과 가미가제 특공대 같은 본보기가 가능하다. 여기서 내가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은 가문의 논리와 국가의 논리가 야기하는 지향점의 확연한 차이다.

우리에게도 예외는 있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백의종군(白衣從軍)했던 이순신은 모친의 부음을 당했으나, 끝내 예를 다하지 못한다. 암군(暗君) 선조로 인해 갖은 고초를 겪었으나 이순신은 자식의 도리보다 국가의 위기극복을 첫머리에 두었다. 1598년 11월 19일 후퇴하는 왜군을 좇아 노량해전에 임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전선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무엇인가? 이순신과 이인영의 근본적인 차이는.

가문의 이해와 국가의 이해가 충돌할 경우 `최종 선택지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효와 충이 정면충돌할 경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같다. 왕과 양반이 권력을 반분하여 성립한 조선왕조. 쇼군을 권력의 정점으로 하여 이루어진 일본. 일본은 페리 제독에게 1854년 강제로 개항당한 이후 1868년 명치유신을 단행한다. 존왕양이를 앞세워 입헌군주제로 전환하면서 근대화에 일로매진한다. 쇼군의 자리를 국왕이 대신한 형국이었다.

국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집행하지 못했던 조선은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도 양반세력을 척결하지 못한다. 왕과 양반의 세력분점의 결과 가문을 중시하는 이데올로기의 하나로 효는 강화일로(强化一路)를 걸었다. 그와 같은 사정이 여일하게 드러난 사건이 이인영의 삼년상과 결부된 일이었으리라. 광복 이후 극도로 강화된 국가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보면 가문의 영광은 상당히 낯설다. 하지만 그것의 연면 부절한 뿌리는 오늘에도 빛을 발한다.

4대강 수질악화를 개선하려고 정부는 얼마 전부터 수문을 개방했다. 이른바 4대강사업이 야기한 `녹조라테` 현상을 둘러싼 책임논쟁이 한창이다. 몇 푼의 돈과 자리를 위해 견강부회(牽强附會)의 논리를 펼친 학자들과 교수들의 책임을 묻는 견해가 있다. 우리의 강역과 역사는 함부로 훼손해서는 아니 된다. 유구하게 흘러온 물줄기를 바꾸고, 거기 시멘트 콘크리트를 들이부을 궁리를 하고, 그런 야만에 논리적인 근거를 댄 자들은 책임져야 한다.

지식인이 길들이고 관계를 맺고 책임을 져야 하는 대상은 아내나 자식에 머물지 않는다. 개인과 가문의 영광을 위해 자연과 역사를 파괴하는 행위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언제까지 가문의 영광을 떠들고 다닐 것인가! 이젠 익숙한 것과 작별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