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영환 신부·한티순교성지 담당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이 있습니다.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만 어린 시절의 마을을 생각하면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됩니다. 그때 가족들의 모습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 어르신들과 친구들 얼굴도 하나 둘씩 떠오릅니다. 그때 키웠던 많은 꿈들도 떠오릅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그 마을을 떠나 오늘까지 어떻게 살아왔던가?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의 꿈을 이룬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겠지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어린 시절 그 마을이 더 생각나고 그곳으로 한 번쯤 돌아가고 싶은 것은 왜 일까요?

골배마실을 간 적이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열다섯 나이에 신학생으로 선발될 당시 가족들이 함께 살던 경기도 용인의 산골입니다. 사제가 되어 이 마을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십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고난의 세월 동안 신부님은 이 마을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요? 꿈속에서 수없이 나타났던 마을이 아니겠습니까? 그사이 체포되어 순교하신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 포졸을 피해 이곳저곳 떠도신 어머니 고우르술라, 여동생과 막내 난식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또 어떠셨을까요? 유학생활 중에도 신부님은 건강이 좋지 않아 많이 아팠으니 오죽 가족 생각이 나셨을까요? 그토록 그리워하던 동네로 돌아와 어머니와 동생을 만났을 때의 심정은 또 어떠셨을까요? 신부님의 귀향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금의환향도 아니었습니다. 불과 겨우 반년 남짓. 1846년 4월. 그곳 은이공소에서 교우들과 함께 드린 부활절 미사가 마지막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신부님께서는 어린 시절 부모님께 순종하며 유학길을 떠나 갖은 고생을 다하셨습니다. 신학생과 신부가 되어서는 주교님께 순종하여 선교사들이 다닐 길을 준비하고자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기셨지요. 그는 가라하면 죽기를 각오하고 갔고, 돌아오라 하면 죽기를 각오하고 돌아오는 순종의 종이였음을. 그 많은 지식을 가졌음에도 붙잡힌 후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꿈쩍하지 않고 천주님 품에 안기신 충직한 종이었음을. 주님께서는 언제나 이 세상 것을 탐하지 않고 하늘의 것 하나만을 탐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매번 우리를 감동시키십니다. 우리와 똑같이 이 세상 속에 살면서도 이 세상의 것을 탐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주님은 당신의 현존을 강하게 드러내십니다. 그런 분들을 보고 듣고 만나게 될 때 누구나 주님께 대한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도록 만드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내 어릴 적 꿈을 추슬러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