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돈 순교와 불교왕국의 태동 (2)

▲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한 `예빈도`. 우측 두 사람은 당나라를 방문한 신라의 사신으로 추정된다.

경주시 효현동에 위치한 법흥왕릉을 찾아가는 길. 봄은 끝자락에 와있었고, 어디선가 여름을 재촉하는 라일락 향기가 풍겨왔다.

지금으로부터 1천500여 년 전. 어떤 신라인보다 먼저 불교가 설파하는 자비와 수신(修身)의 메시지를 제 삶 속에 녹여냈던 법흥왕.

왕릉에서 300m쯤 떨어진 길가에 차를 세우고 야트막한 산을 올랐다. 울울창창 소나무가 저마다 훌쩍 큰 키를 자랑하며 법흥왕의 유택으로 가는 길을 호위하듯 서있었다.

불심 깊은 사람이 본다면 그 소나무들이 큰스님을 보좌하는 동승(童僧)처럼 느껴질 터였다.

경주학연구원 박임관 원장은 법흥왕 시절에 관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차돈과 법흥왕이 생존했을 당시의 신라 사람들은 주로 하늘에서 강림한 조상신을 믿었어요. 그게 아니면 명산대천의 신선이나 천지신명을 섬겼지요. 불교는 자리를 잡기가 힘들었던 시대였습니다.”

`왕즉불(王卽佛·왕이 곧 부처라는 뜻)`의 사상을 통해 왕권을 바로 세우고, 제정일치를 공고히 하려 했던 법흥왕에게 `신라의 불교 공인`이란 일생의 숙제이자 죽기 전에 반드시 이뤄야 할 과업이었다.

때마다 자신의 뜻을 거역하며 호시탐탐 왕의 권력을 노리던 귀족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해서도 불교 중흥과 불교적 내세관은 반드시 필요했다.

 

▲ 신라 23대 왕인 법흥왕의 능묘(墓). `경주의 서악`으로 이야기되는 선도산 서쪽 소나무 숲에 자리해있다. 능에 오르는 길에도 기묘한 형상의 소나무가 여러 그루 서있다.
▲ 신라 23대 왕인 법흥왕의 능묘(墓). `경주의 서악`으로 이야기되는 선도산 서쪽 소나무 숲에 자리해있다. 능에 오르는 길에도 기묘한 형상의 소나무가 여러 그루 서있다.

그래서였다. 그는 귀하게 아끼던 스물한 살 청년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가야 했다. 형리(刑吏)가 휘두른 서슬 푸른 칼에 이차돈의 목이 떨어진 날, 법흥왕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순교`와 `순국`이란 단어가 두렵고 낯선 보통사람으로선 감히 짐작조차 쉽지가 않다.

법흥왕은 귀족들과 나눠가졌던 권력을 되찾아 왕권강화의 기틀을 만든 사람이다. 이로써 신라는 불교왕국으로서의 출발을 알린다. 백성들에게는 더없이 너그러운 군주였으며, 죽음에 임박해서는 정치권력과 재산을 버리고 스스로 승려가 되었던 법흥왕.

일체의 욕심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던 왕이었기 때문일까? 법흥왕릉은 경주 각처에서 발견되는 거대한 능과 달리 작고 소박하다. 그래서 더 정감이 간다. 인근 소나무 숲을 찾아온 새의 청아한 울음소리를 뒤로 하고 산을 내려오는 길. 문득 의문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최고의 권력을 넝마인양 버릴 수 있었던 법흥왕은 그가 꿈꾸던 불국정토에 지금쯤 이르렀을까?

그에게는 1만 근의 황금보다 해탈(解脫)이 더 중요했던 것일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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