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인간은 욕망(慾望) 덩어리다. 욕망은 문자 그대로 어떤 대상을 향한 간절한 소유나 기대를 뜻한다. 갓난아이부터 구순 노인에 이르기까지 욕망은 도처에 편재한다. 그래서일까?! 깨달음을 얻은 고타마 싯다르타는 인간의 생로병사와 수비뇌고(愁悲惱苦)의 근원을 탐욕, 분노, 어리석음에서 보았다. 윤회라는 업보와 인과율의 출발지점 가운데 첫 번째를 탐욕에서 본 것이다.

하지만 되돌려 생각하면 욕망하지 않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배고프면 무엇인가 먹어야 하고, 아프면 빨리 낫고 싶고, 고단하면 한숨 자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 행위가 전제되지 않는 생존은 불가능하다. 생명 가진 존재로 이생에 태어난 사실 자체가 업보일지도 모른다. 깨달은 자들은 하나 같이 윤회의 사슬로부터 벗어나 더 이상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고 한다. 간화선자(看話禪者)들은 오늘도 면벽(面壁)하며 그것을 구하고 있을 게다.

어디 인간만이 욕망하는가. 뭍 생명들은 본디 타자를 죽임으로써 목숨을 부지한다. 정교하게 짜인 먹이사슬은 그것을 웅변한다. 남의 생명을 짓밟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생존이 담보되는 우주의 이치. 어쩌면 노자가 갈파한 `천지불인(天地不仁)`은 여기서 발원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천지는 자연으로 환원하여 생각해도 좋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섭리는 `불인`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잔인하고 비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요 며칠 대구·경북에 사나운 바람이 모질게 불었다. 크고 작은 초목들에서 허다한 꽃과 풀잎들이 대지로 귀환했다. 생동감 넘치고 강력한 녀석들이야 생명을 부지했지만, 그렇지 못한 녀석들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만 것이다. 그렇게 자연은 허약하고 무른 녀석들은 그들의 발생지점으로 되돌린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사회적 안전장치를 만들어 약자들을 돕고 구제한다. 이것이 인간과 자연이 갈라서는 확연한 지점 가운데 하나다.

사회적 약자를 구함은 아름다운 일이며, 자연의 이치를 넘어서는 제민(濟民)이다. 거기에도 욕망이 자리한다. 나와 같지 않은 사람들을 돌보고 함께 하고자 하는 바람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연민과 동정의 심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축복 있을진저! 그러하되 21세기 막장 드라마를 찍는 한국사회는 제폭구민(除暴救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과 너무 멀리 있다.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무장한 무리의 행악질은 끝 간 곳을 모른다.

tvN의 `혼술남녀` 조연출이었던 이한빛 피디가 자살했다. 광화문 사거리 40미터 고공 광고탑에서는 정리해고와 노조탄압으로 거리에 내몰린 6인의 노동자들이 단식농성을 진행하고 있다. 목포 신항에서는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세월호 참사`유가족들의 탄식과 눈물이 흐른다. 이 모든 것의 출발지점은 어디일까?! 돈과 권력을 틀어쥔 재벌과 국가다. 보다 많은 이윤과 돈벌이를 위한 가혹한 착취와 인명경시 풍조를 조장한 기업가 집단과 국가.

전국시대 사상가인 장자는 재상이 되어달라는 초나라 왕의 초청을 간단히 거절한다. 진흙탕 속에서 꼬리를 끄는 거북이가 되겠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일컬어 `예미도중(曳尾塗中)`이라 한다. 시대와 권력을 초월해 살았던 지식인 장자는 선택지가 많았다. 그런 점에서 무소유를 주장한 법정 스님도 대단한 욕망을 가진 분이다. 무소유를 `소유`하리라는 거대한 욕망. 그것이 한낱 불가능한 바람이란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한사코 고집했던 법정.

고도의 물질문명이 일상화된 21세기에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의 선택지는 극히 제한돼 있다. 욕망하지 않음을 욕망하면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처지다. 도저한 선승(禪僧)이나 위대한 천재가 아닌 담에야 우리는 모두 욕망 속에서 살아간다. 차고 넘치는 욕망의 거리와 광장과 지하철에서 욕망하지 않음을 욕망해야 하는 불의한 시대를 생각한다. 그러하되 꽃잎 떨어진 자리에 푸르른 매실이 방울방울 매달려 환하게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