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사드배치를 둘러싼 동북아 정세가 우울하다. 성능이 확인된 것도 아니고, 가격이 헐한 것도 아니며, 한국을 위한 것도 아닌 사드. 미일동맹의 종속변수로 작동하는 한미관계를 위한 사드배치. 어떤 정치적 정당성도 없는 대행정부 관계자들의 매판적 판단에 따른 사드. 사드배치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 사이에서 새우처럼 등이 휘어버린 한국. 주권국가의 체면이 만신창이로 구겨지고 있는 2017년 봄날의 꿀꿀한 정치-외교의 풍경.

668년 평양성 함락이후 1876년 병자수호조약까지 1천200년 중국만 바라보고 살아온 반도국가. 그 후 1910년 경술국치까지 이 나라 저 나라 눈칫밥 먹으며 연명한 조선과 대한제국. 1945년까지 일제의 서슬에 고통 받은 식민지조선과 백성들. 그리고 해방이후 지금까지 `양키 아메리카`의 은혜에 감읍(感泣)하며 견뎌온 70년 세월의 한국 현대사. 오죽하면 탄핵반대 집회에 태극기보다 훨씬 큰 성조기가 등장했겠는가. 검질긴 사대근성 아닌가?!

미 국방부가 여러 경로로 확인한 것처럼 사드는 무소불위의 무기체계가 아니다. 아직도 완결되지 못한 채 진화를 거듭하는 신무기일 따름이다. 어찌 보면 `대기만성`이란 도덕경 구절처럼 끝내 완성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을 국민이나 국회의 동의 없이 마구잡이로 설치하려는 당국자들의 저의(底意)가 괘씸하다. 졸렬하게 처리한 위안부 협상도 모자라 사드문제로 국민의 심기를 사납게 자극하고 찔러대는 저자들의 의도는 무엇일까?!

사드와 위안부문제를 다루는 미국의 태도는 사뭇 불쾌하다. 사드문제는 중국과 위안부문제는 일본과 대화하면서 당사국인 한국에게는 일방통보다. 잠자코 있으라는 투다. 우리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라는 고압적인 자세다. 무슨 말 못할 빌미라도 잡혔는지, 한국정부는 찍소리도 못한 채 미국입장을 대변하고 있을 뿐. 햐, 이것은 장구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배달민족의 자존심을 박박 긁어대는 처사(處事)다.

중국 역시 강경 일변도로 치닫고 있다. 그것도 아주 쩨쩨하기 짝이 없는 방식이다.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의 지은이 마틴 자크가 통찰하는 대국(大國)의 결정체 중국은 부재한다. 조만간 미국과 함께 세계를 둘로 가를 패권국가로 성장하리라는 중국. 그런 중국이 요즘 보여주는 속 좁은 행태는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자국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그런다고 하지만, 그 정도가 우심하여 대국의 당당함과 넉넉함이 사라져버렸다.

주지하는 것처럼 중국은 단기간에 몇몇 질적 변화를 경험했다. 문화혁명 이후 권좌에 오른 등소평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은 1980년대를 풍미한다. 인민들의 배만 부르게 해준다면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괘념치 않겠다는 배포가 내포된 성구(成句)다. 1980년대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줄줄이 무너질 때에도 중국은 버텨낸다. 그들은 은인자중하면서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심정으로 인내한다. 칼날의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 중국.

21세기 초 중국은 `화평굴기(和平屈起)`를 주창한다. 서로 다투지 말고 평화롭게 상호번영을 꾀하자는 말이다. 우리도 이제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니 조심하라는 어조가 담긴 말이다. 그것의 결정체가 2008년 8월 8일 북경올림픽이다. `영웅`(2002)에서 진시황의 입장에 섰던 장예모 감독이 총연출을 담당한 북경올림픽 개막식은 압권이었다. 이제 중국은 `화평굴기`와 `대국굴기`를 넘어서 `돌돌핍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시아 인프라투자은행`과 `일대일로(一帶一路)`로 세계를 호령하는 중국은 보이지 않는다. 사드이후 중국은 철부지 어린애처럼 행동한다. `화하(華夏)`가 세상의 중심이라 자부했던 선조들의 기세등등한 조공외교가 무너지고 있다. 중국의 옹졸한 대한(對韓) 외교정책을 보면 실용주의 노선에 내재한 근본적인 결함이 보인다. 역사적인 인과율과 필연성이 결석한 이해관계의 관철에서 `중국몽(中國夢)`의 퇴락(頹落)을 독서함은 나만의 생각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