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혜원(蕙園) 신윤복의 그림 가운데 `월하정인(月下情人)`이 있다. 선인(先人)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애인이 아니라, 정인이라 일컬었다. 애인은 일본에서 들어온 왜말이다. `월하정인`은 정분(情分)이 난 남녀가 달 아래 어디론가 행보하기 직전의 정경을 담은 그림이다.

요즘 그림에서 일상화된 원근법과 풍경묘사와 사뭇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담장과 달라붙은 듯 보이는 후원. 그곳에서 녹음을 드러내고 있는 나무. 부분월식으로 아래쪽이 보이지 않고 위쪽만 동그마니 드러난 달. 그런 배경을 두고 등잔을 든 사내가 은근한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며 괴춤에서 무엇인가 꺼내고 있다. 볼이 살짝 물든 여인네는 별로 주저하지 않고 사내의 제안을 선선히 받아들이는 품이다.

`월하정인`의 `화제(畵題)`는 “월심심야삼경 양인심사양인지(月深深夜三更 兩人心思兩人知)”. 현대어로 번역하면 “달밤 깊어 삼경인데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 알겠지” 정도다. 화가는 그들의 관계가 사뭇 은밀하다는 것만을 그려낼 뿐 아무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림을 완상(玩賞)하는 사람이 나름대로 해석할 여지를 충분히 베푼 셈이다. 여염집 아낙이 처녀인지 과수댁인지, 그녀를 찾아온 사내가 무엇을 하는 사내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하되, 그는 유부남이다.

대전의 젊은 천문학자의 노력으로 밝혀진 것은 그림 속의 부분월식이 1793년 8월 21일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천체(天體)에서 발생한 부분월식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한밤중의 사랑이야기가 화폭에 담겨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조가 다스리던 18세기 후반 조선시대의 반가(班家)에서 조차 남녀의 은밀한 만남이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이뤄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 그것이 단원(檀園)과 혜원이 그려낸 풍속도가 알려주는 내용이다.

각설하고, 요즘 세간에 회자되는 남녀 이야기를 생각해본다. 그들은 영화감독과 배우로 인연을 맺었고, 지난 `베를린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그런데 세간에서는 그들을 둘러싼 비난이 거세다. 왜냐면 아내가 있는 남자가 결혼하지 않은 여자와 정분이 났기 때문이다. 감독은 이혼하고자 하지만, 옛날 아내는 그럴 마음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혼소송을 진행하고 있다고도 한다. 결국 감독과 여배우는 `불륜남녀`로 각인됐다.

호사가(好事家)들은 그들의 나이 차이와 끝나지 않은 이혼소송을 두고 그들을 비난하느라 골몰한다. 우리나라처럼 남의 일에, 특히 뭔가 낯설고 특별한 행보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나타내는 경우는 흔치 않다. 모두에게 익숙하고 일반화된 행동양식에서 조금만 일탈(逸脫)해도 대중의 입길에 오르내리는 일이 다반사(茶飯事)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고 남들이 하는 양을 따라 하거나 가능하면 튀지 않으려 애쓴다.

다수를 차지하는 그들처럼 옷을 입고, 음식을 먹고, 휴가를 쓰고, 자동차를 구입하고, 아파트에 사는 편이 가장 안전하다. 중간 치기가 유독 많은 나라가 한국이다. 어딜 가나 중간만 하면 된다는 평준화된 의식이 사회여론의 기준이 된다. 그래서 창의적인 사고와 독창적이고 독특한 괴짜의 사유와 인식 혹은 디자인이 나오지 않는다. “될성부른 싹은 어릴 적부터 잘라버리는” 사회가 대한민국이다. 그것도 모자라 낙인(印)을 찍어 마무리한다. “이상한 사람이라던데! 불륜이야!”

몸도 마음도 떠난 사람과 함께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적절한 시기에 우아하게 악수하고 떠나보내고 떠나가는 것이 아름답고 상쾌하다. 그나 그녀가 누구와 무슨 인연을 맺든 그것은 그들의 몫이고 그들의 선택이고 그들의 운명이고 그들의 자유다. 그것이 불륜인지 아닌지, 불장난인지 숙명인지, 가늠하는 것은 그들만이 판단하고 평가할 일이다. `불륜타령`에서 이제는 조금 자유로워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