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어릴 적부터 미술과 공작은 젬병이었다. 특히 입체를 만든다는 것은 은산철벽의 세계였다.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찰흙 만들기도 버거웠다. 그것은 선친의 유산이었으리라. 아버지가 못을 박거나 뭘 만드시는 걸 본 적이 없다. 전기나 수도, 그 밖의 모든 집안일은 어머니 몫이었다. 두 살 터울인 형이 나이 들면서 그 일은 형에게 이관되었다. 어머니의 유전형질을 상속받은 형. 하지만 나는 그런 방면에 전연 무능했지만 뭐 그것을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마당이 소원(疎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나 고양이를 키워보라는 분들도 있었으나, 그것들이 아무도 없는 집에서 우두커니 주인을 기다린다 생각하면 내키지 않았다. 일곱 살, 열 살 무렵 개한테 물린 기억도 상처로 남아 있었으니 달가울 리 없고. 고양이는 또 뭔가 유쾌하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여하튼 3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적막한 마당을 들여다보면서 작심한 것이 닭을 길러보자는 심산이었다.

조류독감이 기승을 떨치는 판국이어서 닭에게 달걀을 얻자는 속셈도 없지는 않았다. 우리가 `치킨`이라 부르는 닭은 대개 30~40일 정도 키워서 잡아먹는 육계(肉鷄)를 가리킨다. 생육조건이 좋다면 닭은 10년 이상 30년까지도 살 수 있다는 정보가 있다. 보기보다 머리도 좋아서 아파트에서 기르던 닭이 집을 나갔다가 승강기를 타고 제 살던 집 앞으로 돌아왔다는 얘기도 들린다. 더욱이 질병에도 강한 편이어서 기르기도 수월하다는 것이다.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고평에 사는 방송사 국장을 찾아갔다. 저간의 사정을 말하니 흔쾌하게 딸기농장을 하는 친구에게 나를 인도한다. 거기서 쇠파이프 여섯 개를 얻고 땅을 깊이 팔 수 있는 묵직한 도구를 빌린다. 가로 4m, 세로 2.6m, 높이 1.5m 규모의 닭장신축을 위한 사전준비는 그렇게 이뤄졌다. 다섯 개 파이프는 제자리를 잡았지만, 나머지 하나는 불가능했다. 그곳이 예전 집터여서 단단한 콘크리트가 바닥에 깔려있던 탓이다.

직사각형에서 변형된 마름모꼴로 닭장의 외형이 바뀐다. 그것으로 하루일과 마무리. 일주일 뒤에 그와 함께 드릴로 파이프에 구멍을 뚫고 나사로 고정하는 난제(難題)에 도전한다. 졸렬한 내 솜씨로 드릴작업은 불가능했고, 국장의 힘과 기능이 절대적으로 작용한다. 폐가에서 주워온 문짝으로 닭장 문을 달고, 자재상에서 철망과 차광막을 구입한다. 족제비나 쥐의 공격을 차단하려면 철망을 땅속으로 20~30㎝ 깊이로 묻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철망을 둘러치며 크고 작은 돌로 요새나 성채처럼 닭장 주위를 막아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이제부터는 독자적인 작업이다. 장마철을 대비해서 닭장 안에 아담한 비닐하우스를 지어주기로 한다. 바닥에 목재 팔레트를 두 개 깔고 그 위에 네 개의 지주(支柱)를 설치해 이층집을 만드는 작업은 고단하기 이를 데 없다. 작업을 지켜보던 옆집 아주머니는 청설모의 공격에도 대비해야 한다면서 이중철망 설치를 추천한다. 하, 이런 일이!

그렇게 다시 하루가 간다. 온몸이 고달프고 통증이 찾아온다. 마침내 네 번째 주 일요일 저녁 사위(四圍)가 어둑해서야 닭장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아중철망을 촘촘히 엮는 작업은 미완(未完)이지만, 일단 닭장 형상만은 그럴 듯하다. 국장 댁에서 얻어온 모과나무 두 줄기를 가로세로로 엮고, 거기에 대나무로 횃대를 설치한다. 옆집 영감님도 잘 만들었다고 한 마디 거든다. 이렇게 커다란 공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닭장을 만들면서 대목(大木)과 그에 딸린 노동자들의 수고에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왔다. 사람 살 집을 짓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되고 의미 있는 일인지 새삼스레 다가온 게다. 봄날이 따뜻해지면 장터에 나가 예닐곱 마리 닭이나 중평아리를 사올 모양이다. 오랜 세월 육체노동과 거리 두고 살아온 인생을 돌이키는 닭장이 감나무 아래 오롯하다. 아직 보지도 못한 닭을 위한 인간의 고단한 노동이라니! 곤줄박이 울음소리 한가로운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