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학 목사·포항제일교회
▲ 이상학 목사·포항제일교회

신앙인의 삶에는 물러남과 나아감이 있다. 요한복음 6장까지 예수님은 나아감의 삶을 사셨다. 마치 때가 되어 시위를 떠난 화살이 과녁을 향해 힘차게 뻗어나감과 같다. 그 기운이 세차고 거셌기에 사람들은 그의 카리스마와 권능을 보고 임금을 삼으려고까지 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요구했다. “양식을 주시고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 주시오”라고 말이다. 예수님은 대중의 이 요구를 뿌리치셨다. 그들에게 하나님과 그분의 먈씀을 양식으로 주시고자 했고 그들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참 지도자로 삼기를 위하셨기 때문이다.

사람 안에 있는 악한 요구에 부응하여 얻는 리더십을 취하지 않으셨다. 이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다시 물러남과 은둔의 길에 접어드셨다.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삼대절기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이는 날이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자신을 예루살렘에 드러내라고 종용한다. 그리나 예수님은 이 요청마저도 거부한다. 이때부터 주님은 본격적으로 은둔의 세월로 들어간다.

복음 때문에 행동반경에 있어서도 제약을 받으시고, 복음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현상수배범처럼 대접을 받는다. 심지어 복음으로 인해 죽음의 그림자를 옆에 끼고 다니는 삶으로 접어든다. 그러나 “내 때가 아직 차지 아니하였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실 만큼 예수님의 영적 초점은 뚜렷하고 분명하다. 예루살렘에서 자신을 나타내실 때까지 그 은둔의 시간 속에서 영적 공력을 닦고 닦으셨다.

이 부분은 공관복음이 주목하지 않은 예수님의 생의 한 국면이다. 공관복음에서는 공생애 직전 광야 40일간의 운둔과 영적훈련으로 예수님 사역의 모든 준비가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그 뒤의 공생애는 시위를 떠난 화살이 십자가라는 푯대를 향해 날아간 길로 묘사한다. 반면 영적 복음인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 즉 공적인 사역 안에 이미 물러남과 나아감이 함께 있음을 드러내 보여준다.

은둔은 대중으로부터 자기를 지움으로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만 자기를 발견하고자 하는 행동이다. 하나님과의 훈련의 시간을 통해 자신에게 기회를 주실 때에 화살처럼 과녁을 향해 나아갈 준비를 하는 시간이다.

주님은 본격적으로 물러남을 통해 십자가를 향해 가는 걸음을 준비하셨다. 원수를 제압하고 인류를 묶인 데서 풀어내는 십자가 화살을 준비하신 것이다. 쓰입받기를 원한다면 준비해야 한다. 멀리 뻗어 나기를 원한다면 물러나 움츠릴 줄 알아야 한다. 구속 곧 죄 사함은 거저 받지만,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물러나 은둔과 가림을 통해 자기를 살피고 죄와 허물을 극복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왜 사람들의 시선에 자기를 맡겨 그들이 원하는 춤을 추다가 인생을 허비하고자 하는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춤을 춰야 한다. 이를 위해 물러나 영혼을 갈고 닦고 조이고 기름칠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때는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