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민호<br /><br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옛날에 나는 생각이 많은 아이였다. 내 자신에 대해서 곱씹어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곰곰이 뜯어 생각하곤 했다. 그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 살펴보고 어떤 유형의 사람이겠구나 하고 가늠해 보고 사귈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주의 깊게 판단해 보곤 했다.

중고등학교 학창시절을 그렇게 보낸 것 같다. 나는 내 자신이 그렇게 평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늘 남의 시선을 의식했고 그런 만큼 타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도 길었다. 그러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어떤 유형 같은 것으로 묶일 수 있음도 깨달았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짓는 사람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를 파악할 수도 있는 것 같았다.

대학에 가 보니 세상은 더 넓고 사람들은 더 종류가 많았다. 내가 접하고 생각할 수 있었던 사람보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많은 것을 새로 생각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구나 각 지방에서 모여든 학생들끼리 부대끼다 보니 사고방식이 정말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했고 그러나 보니 더 많은 관찰과 탐색이 필요했다.

시간이 흐르자 나는 또 어느 정도 사람 보는 눈이 새로 생겼다고 자신할 만하게 되었다. 직관이라는 게 있는데, 어느 철학책을 보니 직관은 그냥 홀연히 생기는 게 아니라 경험이 오래 축적된 나머지 그 경험 자료의 축적에 힘입어 무엇을 보면 반사적으로 통찰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직관이라 한다고 했다. 직관이란 선천적인 능력이 아니라 경험의 산물이라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사례들을 접하고 생각할수록 직관은 발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면 나는 어느덧 직관이 발달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을 척, 하고 보면 사귀어야 할 사람인지 피해야 할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했고 내 나름대로 정한 척도에 따라 이 사람 아니다 생각하면 안 만나고 이 사람이다 싶으면 만나고 하기를 반복했다. 한눈에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오랫동안 내 나름대로의 기준에 따라 사람을 만나고 헤어졌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이제 옛날에는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는 때가 왔다. 믿었던 사람에게 발등을 찍히는 경우도 생겼고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사람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적어도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일 것이다, 하고 생각했던 것이 알고 보니 전혀 다른 계산속에서 속내와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을 뿐임을 알게 되는 경우도 생겼다.

내 자신의 감별력에 대해서 믿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은 사람이란 변하게 마련이어서 나도 옛날의 내가 아니요 내가 알던 사람도 옛날의 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도 변하고 남도 변하고 있어 원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이제는 나 자신의 능력의 부족 때문만 아니라 그 가변성 때문에 알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사람 사이의 사귐이란 아주 어려운 것이라 생각한다. 한 번 알고 맺어짐이 있어 그것을 그대로 지킬 수 있으면 좋으련만 끝내 나 자신이 달라지고 상대도 달라져서 만남을, 사귐을 지속시킬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전에 좋았던 것이 싫어지고 싫었던 것을 추구하게 되어 더 이상 그 사람과 사귐을 지속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지금 몇 사람의 친구가 있나 생각해 본다. 하나, 둘, 셋을 헤아리다 말고 자신이 없다. 정말 귀한 것은 그 이상을 넘어서기 어려운가 한다. 이것이 인생의 슬픔이요, 굳이 서글퍼할 일도 아니리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