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br /><br />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한자어로 `시(詩)`를 보면 절(寺)에서 하는 말(言)이다. 구도자인 스님의 언어로 이해 가능하다. 참선수양에 기초한 선종(禪宗)의 영향이 강한 한국 불교에서 본다면 불가(佛家)의 언어는 소략하리라. 수다스러운 스님을 생각하는 것은 불편한 일이기 때문이다. 화두 혹은 공안(公案)을 붙들고 맹렬하게 면벽 수도하는 수도승의 모습을 떠올리면 좋을 터. 진리의 요체는 간결함에 있고, `돈오돈수`를 깨달음의 방편(方便)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장황함은 문득 낯설다.

시의 본질은 간결함 속에 깊이와 다채로움의 함축에 있다. 예외적인 형식, 예컨대 산문시나 서사시는 별도로 하고 말이다. 깊이 있는 성찰과 지성을 다채로운 언어 형식으로 간결하게 드러냄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 시를 쓰는 고단함이 자리한다. 아무나 시인이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동료교수 가운데 시인이 있으면, 나는 교수 대신 언제나 시인이란 호칭을 쓴다. 교수는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시인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시인들의 시는 이해하기 어렵다. 주관성의 영역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주변적인 일상이나 사유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윤동주나 이육사, 한용운과 김남주, 박노해 시인의 시는 어렵지 않다. 어려운 시는 독자들과 멀어진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시를 읽는다는 것은 강제노역에 가깝다. 시가 어렵기도 하지만 한국인들은 본디 시를 읽지 않는다. 시집을 사지도 않고, 시인을 존중하지도 않는다. 현대 한국사회의 거칢은 여기서 발원한다.

언어는 인간사유의 창고이며, 소통의 기초적인 수단이자 실천의 기반이다. 언어로 자신의 사유와 인식을 정확하고 자유자재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은 지식인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돈과 권력을 가지고 뒤흔들게 되면 사회는 거칠고 황막해진다. 그래서다.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시를 읽고 느끼며 써보려고 하는 까닭은 거기 있다. 시를 읽고 음미하면서 정서와 인식을 함양하는 사람들의 사회는 따스하고 깊이 있는 인간관계가 가능하다.

우리 조상들이 남긴 45자 내외의 시조(時調)나 일본 대중들이 즐겼다는 `하이쿠`는 오늘날까지도 적잖은 의미를 던진다. 단순한 형식과 단출한 내용을 담은 시조와 하이쿠에서 깊이 있는 성찰과 대면하는 일은 실로 유쾌한 일이다. 그런데 시조나 하이쿠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학생들이 늘어가고 있다. 수능시험에서 필요한 최소한도의 문제풀기 능력만 지참한 채 대학생이 되고, 그런 상태로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이 차고 넘쳐나는 대한민국.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봄바람 소리 이젠의 귓가에 말방울 소리.” 일본의 하이쿠 시인 히로세 이젠의 하이쿠다. 봄바람은 겨울바람이나 여름의 태풍처럼 거세지 않은 미풍(微風)이 주류다. 하여 그 바람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계절에 민감한 시인의 귀는 봄바람 소리에서 말방울 소리를 듣는다. 누구의 귀에도 들리는 `짤랑짤랑` 하는 명징한 소리로 들려오는 봄바람. 감수성이 풍부하고 섬세한 감촉의 시인 히로세 이젠의 절창이다.

하지만 대학생들은 이 시의 본질과 풍류(風流)를 이해하지 못한다. 가던 걸음 멈추고 봄바람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다. 물론 말방울 소리도 헤아려본 적이 없다. 자연과 무관하게 시멘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범벅된 도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무감각한 세대. 문제는 그런 거칠고 둔탁한 서정의 변화와 발흥을 위해 기성세대가 해주는 게 없다는 사실이다. 먹고사는 게 급선문데, 시 나부랭이가 뭐 대수냐, 하는 인식에 갇혀있는 한국의 거친 기성세대.

사정이 이럴진대, 우리나라에서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고단한 일이다. 사회적 인식은 고사하고 배고프고 등골 써늘한 직업인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노릇은 얼마나 고달픈 일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시인을 사랑하고 시를 읽어야 한다. 시에서 구원과 희망과 미래의 별빛을 독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여, 정유년의 밝히는 찬연한 횃불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