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윤동주 시인이 남긴 `참회록` 1연이다. 시인은 녹슨 동경(銅鏡)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서 욕된 자태를 독서한다. 이제는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왕조의 후신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시인. 오래도록 닦지 않아서 파랗게 녹슨 구리거울에 비쳐진 얼굴은 흐릿하기도 하고 나이에 비해 늙고 초췌해 보인다. 그것을 자조(自嘲)하는 청년시인.

왕조의 유물이면 응당 박물관에 있어야 할 터. 거기서 치욕을 읽어내는 시인의 내면풍경은 스산하기 이를 데 없다. 기독교인의 원죄의식과 부끄러움이라는 두 가지 어휘를 끼고 살았던 윤동주. 시인은 한반도 어디, 어느 무렵쯤 있었을 왕조를 사유한다. 근사치(近似値)는 조선왕조였을 터. 반도를 떠나 용정 `명동촌`을 떠돌아야 했던 집안의 장손 동주. 식민지 청년문사를 자조와 회한으로 인도하는 동인(動因)은 무엇이었을까.

조선왕조의 신민(臣民)은 국왕에게 충성했다. 그러나 충과 효를 근간으로 한 조선의 궁극적인 힘은 충이 아니라, 효에서 나왔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왕가의 인식저변에 깔린 것은 종묘사직이었고, 그것은 왕가가 끝난다면 국가도 소멸한다는 생각이었다. 불이 나더라도 조상들의 신주단지만은 반드시 챙겨야 한다는 것이 양반들의 행태였다. 그래서일까?! 국난이 닥쳤을 때 조선을 구한 주체는 왕가도 양반도 아닌 불학무식한 민(중)이었다.

`국뽕`이라 일컬어지는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이 큰아들 회에게 말한다. “충은 군왕이 아니라, 백성을 향하는 것이다!” 아버지를 죽이려 했고, 끊임없이 의심의 눈으로 통제사를 바라보는 암군(暗君)을 향한 충성에 문제를 제기한 아들 회. 그에 대한 순신의 간결한 대답이 백성을 향한 충이다. 국왕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민)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고 있음을 설파한 것이다.

16세기 인간 이순신의 사유는 그러했다. 그럼에도 조선은 망하고야 말았다. 나는 그 원인을 이순신의 충이 아니라, 사적(私的)인 관계의 충에서 본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이순신 사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야기한 자들의 사유와 실천의 근간에 자리한 것은 민이 아닌, 군왕을 향한 충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영달과 가문의 영광을 위한 행동이었다. 국가와 민과 지도층의 충과 의리 대신 가문과 군왕과 신하의 거래가 똬리를 튼 것이다.

신년벽두에 새삼 충을 생각하는 것은 그 잘난 머리와 실력을 가졌다는 자들의 대통령 1인을 향한 충과 그 이득에 문득 아득해진 까닭이다. 숱한 교수와 박사와 사시합격자들이 위증(僞證)을 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하는 자리와 이득과 패거리주의에 끝내 절망하는 것이다. 입만 벌리면 국가와 민족을 말하던 자들의 마지막 모습이 돈과 권력에 귀착하지 않았는가!

보수와 수구세력과 그 추종자들이 구두선(口頭禪)처럼 뇌까리는 애국과 애족은 어디 갔는가. 안보와 민생을 외쳤던 자들의 궁극적인 지향은 무엇이었는가. 부패와 무능과 타락과 패거리주의로 점철된 보수와 수구세력의 분탕질을 보면서 동주의 시를 떠올린다. 만 24년 1개월에 썼다는 처절한 시 `참회록`. 그 새파란 나이에 윤동주는 그런 고백을 해야 할 만큼 수치스러운 삶을 살았던가. 한국의 보수와 수구가 자랑스러운 자들에게 나는 묻는다.

동주의 `참회록`을 읽고 그 뜻을 헤아린 적이 있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맑고 투명한 시인의 생애에서 솟구치는 고독과 설움과 성찰의 메시지를 꿈에라도 돌이킨 적이 있었는가?! 그리하여 마침내 수치의 굴레로부터 해방되고자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던가?! 시인의 성찰이 새삼스런 냉랭한 겨울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