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계 성혼 평전한영우 지음민음사 펴냄·인문

임금을 향해 목숨 걸고 직언을 토해 냈던 강직하고 청렴한 참선비의 표상 성혼의 삶을 그린 `우계 성혼 평전`(민음사)이 출간됐다.

성혼은 절친한 친구 율곡 이이와 함께 조선 후기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지만 그 삶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본 시조 “말 없는 청산이요, 태 없는 유수로다….”를 쓴 깨끗한 선비, 성리학의 대가 정도로만 기억된다. 그간 성혼을 조명한 저작이나 논문들도 대개가 그의 학술적 업적이나 문학 세계, 교육 사상 등을 다루고 있다.

조선 시대 연구에 매진해 온 원로이자 우리 시대 대표적 국사학자인 한영우 교수는 `우계 성혼 평전`을 통해 “가학(家學)의 전통이 있고, 의식주의 생활도 있고, 건강상의 문제도 있고, 희로애락의 감정도 있는 사람”으로서 성혼의 인간적인 참모습을 보여 주고자 한다. 이러한 삶의 현장을 알고 난 뒤에야 그의 학문과 가치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혼은 1535년(중종 35년) 청송 성수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성수침은 조광조의 문인이 돼 벼슬을 포기하고 깨끗한 재야 선비의 길을 걸었는데, 벼슬이 없는 성수침의 삶은 곤궁해 종종 식량이 떨어질 정도로 가난했다. 넉넉지 않은 가세는 아들 성혼에게도 이어져 환곡을 받지 않으면 봄철을 넘기기 어려울 정도였으며, 항상 생활에 곤궁을 느끼고 살았다. 그나마 가솔이 많지 않아 겨우 자립은 했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그마저도 유지하지 못하고 처참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왜란 때 집이 불타 버리고 먹을 양식도 없어 절에서 밥을 얻어먹는가 하면 종이로 옷을 만들어 입고 친구에게 옷을 부탁하는 편지를 여러 차례 보내기도 했다.

이렇듯 궁핍한 생활에도 성혼은 수십 차례 거듭된 임금의 부름을 거절하고 부귀영화를 멀리한 채 파주 우계의 오두막집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그는 절친한 친구 이이에게도 가정 형편을 이유로 벼슬하면 언젠가는 이욕에 매달리는 타락한 선비가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게다가 이이의 벼슬살이를 지켜보며 선조가 진정으로 선비를 등용하고 받아들이는 임금이 아님을 알았기에 더욱 조정에 나아가기를 거부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바깥세상에 대해 관심을 거둔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는 나라와 백성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을 한시도 저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벼슬자리에 갇히거나 당파의 압력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을 꼿꼿이 지킴으로써 임금을 향한 자신의 직언에 더욱 큰 힘을 실을 수 있었다. 결국 성혼의 삶은 선조의 미움과 반대파의 거센 공격 속에 쓸쓸히 끝나고 말았다.

저자 한영우 교수는 전작 `율곡 이이 평전`을 저술하면서 이이와 실과 바늘처럼 붙어다니는 또 한 사람, 성혼을 만났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살아서도 한 몸 같았고, 죽은 뒤에도 함께 문묘에 배향됐다. 성혼은 아버지 성수침의 영향으로 성리학 전도사이자 자기완성을 지향하는 도인의 경지에 이르렀고, 친구 이이의 영향으로 이기설의 새로운 경지와 나라를 경영하는 경세를 터득했다. 성혼과 이이는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가장 가까운 평생 동지였다. 성혼과 이이는 모두 경장의 필요성을 공감했다. 자신들이 처한 시대가 토붕와해(土崩瓦解), 즉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지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하고 시급히 경장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임금을 압박했다. 둘은 여러 차례 만언(萬言)에 달하는 장문의 상소와 경연에서의 서슴없는 직언으로 현명한 인재 등용과 공납제도 개선 등을 임금에게 강력히 역설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고, 그 결과는 임진왜란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성혼과 이이 사이에 오간 교류와 토론을 통해 조선 후기 사회를 연 큰 스승들의 학문과 정치적 식견이 형성되는 과정을 상세히 보여준다. 조선 후기 붕당의 정쟁으로 인해 굳어진 `이이는 노론, 성혼은 소론`이라는 도식에서 벗어나 본래 한 몸이었던 두 물줄기의 원류를 바로 보고,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몸과 마을을 불사르고 후학을 길러낸 참선비의 모습을 찾는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