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겨울이 깊다. 어둡고 춥고 봄이 올 것 같지 않은 막막함이 여러 날을 두고 계속된다. 따스한 봄을 생각하며 이 날들을 견뎌보려 해도 살갗을 투과해 들어오는 한기는 간단히 막을 수가 없다.

그냥 생각해 본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가톨릭의 사도 바울은 믿음, 사랑, 소망을 말했다고 한다. 나는 성경을 잘 모르기에 성경에 쓰인 말씀은 알 수 없다. 다만 최근에 읽은 현대적 해석에 관한 책에 따르면 믿음은 부활을 믿음이요, 사랑은 믿음을 나누는 것이요, 소망은 부활이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임재해 있음을 아는 것이라 했다.

바울은 소아시아 지방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고 원래는 그리스도 같은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깨달음을 얻는 은총의 순간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로부터 그는 새로운 사랑의 종교,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을, 그리고 모든 이방의 민족들을 차별하지 않고 한 품안에 끌어안는 믿음의 전파자가 되었다고 했다.

이 책을 통하여 나는 왜 기독교가 이스라엘, 예루살렘과 거리가 먼 이방인들에게도 믿음의 종교가 될 수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이 종교를 믿는다는 뜻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예수에서 시작된 유대교의 `개혁`이 바울을 통하여 `대승적인` 새로운 세계종교가 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읽는 철학 책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다. 번역문이 매끄럽지만은 않았고 그래서 단락과 단락, 문장과 문장이 정확하게 이어지거나 들어맞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어려운 논리의 계단을 밟아가는 과정에서 나는 오랜만에 책장을 아껴가며 넘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책이 다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사이에 어느덧 마지막 장에 도착했다. 아쉬움 속에서, 다시 한 번 읽을 것을 기약하며, 책상에 책을 조심스레 눕혔다.

겨울이 깊구나.

한숨 속에서 나는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막막해 하는가 하고 생각했다.

믿음이 없다는 것. 믿을 수 없다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기구 사이의 믿음이 단절되어 버린 것. 사람살이에는 무엇보다 사랑이 필요한데 믿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 나는 지금 그런 소망의 부재를 견뎌야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너무 세속적인 해석일까.

`나`를 해치리라고 생각되지 않아야 할 기구가 알 수 없는 곳에서 낙인을 찍고 목록을 작성하고 위해를 가할 작정을 하는 것. 사람이 사람을 해하는데 어떤 특별한 목적이나 이익조차 없이도 오로지 그를 해할 수 있는 기쁨과 쾌락 때문에 그런 일을 행할 수도 있다는 것. 원조를 받은 사람이 원조의 기억을 유지하려 보답하려 애쓰기는 커녕 무슨 도움이었더냐고 반문을 하는 것.

응당 사람살이를 위해 기대되어도 좋을 믿음이 배신을 받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유대가 단절되는 듯한 경험에 직면할 때 겨울은 깊다. 겨울은 봄이 될 희망을 얻지 못한다.

책에서 저자는 열심히 사도 바울의 서신들을 따라가며 그가 죽음의 옹호자가 아니었고 삶을 위해 싸운 사람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사람에게 죽음이 있기 때문에 죽음 너머의 영생을 위해 신과 신의 심판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과 달리, 그들의 바울에 대한 선입견과 달리, 바울은 오히려 삶을 위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 자체의 구원을 위해 일했으며 그것이 바로 그가 매번 반복해서 되돌아가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의였다는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갑자기 기독교식으로, 바울 식으로 부활을 믿고 싶어졌다. 이 세계가 지금 여기서 되살아나는 그런 꿈을 꾸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