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민호<br /><br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가치혁명이라는 말은 무슨 경제학적 용어였던 것 같은데 말 그대로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 하는 얘기다.

광화문에 지난 시월 말부터 지금까지 모여드는 사람들에 관해서 하는 말이 있다.

하나는 노인층 분들까지 광장에 나온다는 것. 이분들이 어떤 분들인가 하면 8·15광복도 겪고, 6·25도 겪고, 4·19에 5·16에 1980년 광주항쟁에 1987년 민주항쟁까지 다 겪은 분들이다. 식민지 시대의 괴로움과 좌우익 반목에 전쟁의 살육, 독재, 민주화 다 거친 분들이 바로 이 노인분들이시다.

다른 하나. 대학생도 나오지만 고등학생들, 중학생들이 광장에 나오고 있다. 이점은 1987년 민주항쟁을 생각할 때 가장 큰 차이다. 그때는 대학생과 이른바 넥타이 부대라고 불리는 기성 시민 층이 상황을 주도했다. 그때 `노학연대`라는 말도 있었듯이, 학생이 모든 사회적 문제에 참여하고, 그럴 수는 없는 것인데도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주체라도 되는 것처럼 대두했다.

지금 대학생들은 이 현대 생활 메커니즘의 부속화 경향에 깊이 침윤되었다. 다시 깨어나고 있다고는 해도 옛날 같은 `주력부대` 의미는 없다.

대신에 지금 이상하게도, 또 노인분들 놀라시도록, 중고등학생이 광장에서 눈에 띈다. 좋다고 만은 할 수 없는 일일 수 있다. 세상에 일찍 눈뜬다는 것, 사회적 이슈의 어느 한 편에 서기를 결정하고 행동 방식을 선택한다는 것. 좋지만은 않다.

그런데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87년도에 대학생들이 사회적 필연성에 의해 거리로 나왔듯이 지금 중고생들이 광장으로 나온다. 하나는 세월호처럼 우리가 겪은 십대 청소년들의 상처로 인해. 그러나 다른 하나는, 이것이 중요한데, 삶의 양식에 대한 가치관의 혁명으로 인해.

조국 근대화를 말하던 시대에 세상은 무엇보다 달러로 환산되어 측정되어야 했다. 1억불, 10억불, 100억불 수출은 그것이 가상이든, 실제든 우리들의 삶은 그것 때문에 나아져 가는 것처럼 보였다.

물질 위에 지위와 명예가 함께 축조된 가치의 위계서열! 그런데 지금 이것이 바야흐로 허물어지고 있다!

노인과 십대들이 광장에 나온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것이 있다.

그분들, 그 친구들이 최근 세 달 사이에 이 가치축이 지배하는 사회의 내부를 적나라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 내부는 겉면, 윗면의 화려함, 장려함에 비추어 뜻밖에도 너무나 초라하고, 비속하고, 야만적이었다. 겉과 속의 대립과 괴리를 이번에 사람들은 너무나 충격적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돈을 외형적으로 얼마나 많이 가지면 뭐하나? 삶이 거짓과 위선과 타락과 탐욕으로 가득차 있는데 평생 아무리 써도 다 쓸 수 없는 돈을 남의 눈을 속이며 쌓아두고 있으면 뭐하나?

또 지위가 아무리 올라가고 이름이 어떻게 알려지면 뭐하나? 나의 상승이 남의 희생 위에 이루어지는 냉혹한 생존경쟁을 뚫고 내가 오늘의 불완전한 승리자가 되면 행복할까?

이것이 많은 이들의 심중에서 싹터 광장으로 흘러들었다. 광장의 노인분들, 십대들은 바로 이 가치관의 혁명, 가치혁명을 보여준다. 삶을 길게, 믿을 것을 믿고 살아왔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어른들의 세상이 이렇게 곪고 있었음을 우리들은 너무 일찍 알았습니다.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인들이 달라질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이 사람들의 삶에 그런 전환이 있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물질적 척도의 시대를 모두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미래는 언제나 개선되고 달라져야 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