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인간 때문에 사시를 없앤다고 한 거야. 인성 테스트 받으면 낙제할 인간들.”
혜리는 자기가 일을 당한 듯 분통을 터뜨렸다. 효은은 어쩔 줄 몰라하며 소란의 기색만 살폈다.

밤 열 시다.

평소 같으면 한창 책장에 코를 박고 있어야 할 시간이다.

하지만 소란은 벌써 며칠째 공부에 집중할 수 없다. 감기몸살은 겨우 진정 되었지만 아직 잔물 같은 두통이 소란을 괴롭혔다.

그래도 시원한 바람이라도 쏘여야 살 것 같다.

소란은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 고시원 복도를 빠져나왔다.

상명 고시원은 학교로 올라가는 언덕길에 있다. 소란은 이 길을 좋아한다. 소란의 지난 몇 년은 고시원과 이 길과 학교 캠퍼스 사이에 놓여 있었다.

7016번 마을버스가 소란 곁을 지나쳐 엉금엉금 기어 올라갔다. 자하문 넘어 서울 안으로 들어가 멀리 홍대 앞까지 가는 버스였다. 소란이 사는 세검정 쪽은 같은 서울이라 해도 북한산 기운 탓에 한적한 교외 같은 느낌을 주었다.

십이월 하현 달빛을 받으며 소란은 교문 앞까지 올라간다. 소란의 밤 산책길은 교문 앞을 돌아 탕춘대성 앞으로 내려가 다시 고시원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교문 앞.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던 학생들이 방금 올라온 7016번 버스를 타고 있다. 그중에는 홍대 앞 피카소 거리로 직행하는 학생도 있을 것이다. 몇 년 전의 자기처럼 말이다.

소란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누구나 비슷한 길을 걸어 나이를 먹고 또 다른 세상으로 합류해 들어간다. 처음부터 자기만의 생을 아프게 자각하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대부분 때가 되어야 깨닫는다.

버스가 학생들을 빼곡히 태우고 출발했다. 버스가 떠나자 버스에 가려 보이지 않던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진로 및 취업 지도 선도 시범대학`

ㅡ우리도 차라리 어디라도 취직하는 게 어떨까.

며칠 전 셋이서 함께 이곳에 왔을 때 효은이 이렇게 말했다. 효은은 지금 남동생이 대학 입시 중이기 때문에 사정이 급했다. 동생도 서울로 올라오고 싶어 하지만 등록금이 싼 시립대에 들어갈 실력은 못된다고 했다.

ㅡ아서. 우리 같은 애들은 어물쩡 취직했다가는 몇 년 쓰고 버리는 소모품 취급당하기 십상이야.

혜리 말이 맞다. 그래서 7급 행정직이라도 어떻게든 매달렸던 게 아닌가.

셋 다 지방 출신이지만 혜리는 효은이나 소란보다 성격이 괄괄하다. 무슨 게이트다 뭐다 신문방송에 오르내릴 때면 눈을 크게 치켜뜨곤 한다.

그런 애가 공무원은 무슨.

소란은 혜리의 화난 얼굴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짓는다. 혜리나 자기나 모두 공무원 체질은 못되는 것 같다.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하나.

막막하다. 하지만 학교에 더 남아 있을 이유는 없어진 것 같다. 고시를 본다고 몇 번씩 휴학을 했지만 더 이상은 졸업을 미룰 수 없다.

소란은 발길을 돌려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반달인데도 오늘 달빛은 유난히 흰 것 같다.

내일이나 모레쯤 고시원을 나가야겠다고 작정한 탓인지 언덕길의 가게들은 더 정답게 느껴진다.

저쪽 편 카페`코스타`는 고시생들끼리 스터디를 하는 곳이다. 쌉싸름한 커피맛이 일품이다. 그 옆에 작은 `이디야` 커피는 젊은 아저씨가 몹시 친절하고, 고시원 바로 옆의 `함께식탁`은 집밥 맛이 난다. 또 그 밑으로 `쭈제집`. 스트레스가 심할 때 자주 찾는 단골집이다. 쭈제는 쭈꾸미와 제육을 합친 신조어다.

소란의 발걸음은 이제 명우를 생각나게 한다. 카페 `에밀레`. 여기서 소란은 명우와 처음 마주앉았다. 3학년 때였다. 학교 축제 때 자기 친구를 따라 놀러온 명우를 만났다.

더 내려가 큰길 가까이에는`팔선생`이 있다. 중화요리 체인점이지만 정원도, 식당도 멋스럽다. 언젠가 소란은 명우와 함께 여기서 꿔바로우에 짬뽕까지 맛있게 먹은 적이 있다.

팔선생의 빨갛게 빛나는 간판 밑으로 크리스마스트리와 눈사람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도 이틀이나 지났다. 그날 여행이라도 갔다 오겠다던 명우는 문자 하나만 달랑 던져놓고는 아무 소식 없다.

홍제천 다리를 건너면 큰길 삼거리다. 위로는 국민대 방향, 아래로는 홍제동 방향, 앞으로는 자하문 쪽이다. 아랫길로 나가기 전에 홍제천을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바로 꺽어들면 탕춘대성이다.

소란은 오늘 이 길을 아껴두고 횡단보도를 가로지른다. 빨간불이 켜졌지만 차들은 없다. 있어도 상관없을 것 같다.

ㅡ남자는 많아.

ㅡ진작 헤어지는 게 좋았지. 늦었지만 차라리 다행이야.

며칠 전 혜리와 효은은 소란을`소세지 하우스`로 데려갔다. 창밖으로 학교 캠퍼스 건물들이 건너 보이는 집으로 분위기가 있다. 고시생들이 찾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곳이건만 그날 효은과 혜리는 괴로워하는 소란을 위해 마음들을 썼다.

ㅡ명우 녀석, 내 그럴 줄 알았어. 처음부터 애답잖게 명품깨나 밝혔잖아. 향수도 비싼 것만 쓰고.

혜리는 지난 3년새 명우를 무척이나 못마땅해 했다. 이번에도 끝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식이다.

소란도 그런 명우를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뜻대로 되나. 소란 쪽에서도 벌써 여러 번 헤어지려 했던 것을, 그때마다 포기하고 말았다.

ㅡ하긴. 발표 난 지 얼마나 됐다고 헤어지자 말자야. 걔도 참 한심해.

그랬다. 11월 11일인가 최종 합격 통지를 받고나자 명우는 거짓말같이 달라져버렸다.

둘이서 함께 이 집에서 합격을 자축한 게 마지막이었다.

ㅡ축하해.

그날 소란은 자기가 합격한 것처럼 기뻐했다. 모르면 몰라도 명우 자신보다 더 기뻐했는지도 몰랐다.

ㅡ고맙다. 니가 알바라도 해서 도와주지 않았으면 못해냈을 거야.

ㅡ무슨. 밤잠 안자고 공부하는 거, 내가 다 봤잖아.

ㅡ세상이 대낮처럼 환해진 것 같다.

그날 맥주잔을 든 명우의 두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야심만만해 보이던 명우였다.

ㅡ세상에 꼭 성공해 보이겠어.

소란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아이는 흔치 않다고 생각했다. 요즘 애들 같지 않게 눈빛이 살아있어 좋았다.

나중에서야 소란은 명우네 집 형편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청소 용역 일을 하다 그만두시고 어머니가 음식점에 나가 일하신다 했다.

ㅡ사람은 우선 자기가 바로 서야 남도 보살필 수 있어.

명우는 세상에 무슨 앙갚음이라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소란은 명우의 말을 그대로 다 수긍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그가 옳아서, 잘나서가 아니다. 많은 경우 여자는 연민 때문에 남자를 사랑한다.

횡단보도 건너 바로 앞이 2층에 소세지 하우스가 있는 골동품집이다. 그날 둘이 늦게 맥주집을 나온 게 꼭 이때쯤이었다. 오늘 소란은 혼자 가게 앞에 서서 그날의 말들을 떠올린다.

ㅡ저거.

소란은 불 환히 밝힌 쇼윈도 안을 가리켰다. 주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ㅡ뭐?

ㅡ배트맨 말야.

ㅡ골동품집에 웬 피규어야.

ㅡ오래 되었대. 삼십 년도 넘었다나.

ㅡ배트맨이 그렇게 오래됐나?

ㅡ비싸. 십오만 원이나 해.

ㅡ말도 안 돼.

ㅡ나, 저거 갖고 싶어.

골동품집 배트맨을 볼 때마다 소란은 힘이 솟는 것 같았다. 고담 시의 영웅 배트맨처럼 이 세상에도 악을 물리칠 수 있는 인물이 있어야 했다.

명우는 소란을 보고 피식, 웃었다.

ㅡ뭐야, 아이같이.

명우는 아직 쇼윈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소란을 끌고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탕춘대성 쪽으로 향했다.

오늘 그날의 명우는 옆에 없다. 소란은 혼자서 배트맨을 들여다보고 있다.

코멧은 잘 있을까.

골동품집 바로 옆에 오토바이 가게가 있다. 소란은 거기 붙여 놓은 포스터에서 코멧을 처음 만났다. 언젠가는 코멧 250R을 타고 땅 끝까지 달려가고 싶었다. 코멧에 올라탄 레이싱걸은 오늘도 활짝 웃고 있다. 겨울인데도 짧은 핫팬츠만 걸쳤다.

오토바이 가게 앞에는 늘 큰 소파가 혼자서 쉬고 있다. 밤이나 낮이나 소파는 아무 할 일 없는 할아버지처럼 사람들을 기다린다. 오늘밤도 소파는 마치 누군가 와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어느 때보다 느긋한 표정으로 소란을 올려다본다.

소란은 소파에 털썩 걸터앉는다. 잠시 쉬어 보기로 한다. 길 건너 탕춘대성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균형 잡힌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멀리서 보는 누각은 더욱 맵시 있게 느껴진다.

춥다.

춥다고 소란은 느낀다. 명우가 아니라 감기 때문일 것이다. 소란은 한기를 느끼며 일어나 횡단보도를 건너 탕춘대성 쪽으로 향한다.

탕춘대성은 근처에 탕춘대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에 북한산성과 서울 도성을 잇는 성곽을 짓고 탕춘대성을 지어 관문으로 삼았다 했다.

ㅡ탕춘대라, 이름 참 좋아.

명우는 탕춘대성에 올 때마다 감탄을 했다.

봄을 탕진하는 곳이라니.

소란은 탕춘대를 지었다는 연산군을 생각했다. 탕춘대는 혹은 탕춘정이라고도 했다.

1,2학년 때 하던 연극을 계속했더라면 고시공부에 뛰어들 생각은 안했을 것이다. 2학년 가을에 조연으로 세 번째 무대에 서면서 소란은 연극과 자기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 속에 타인의 영혼을 품는 것이, 그때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지금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명우의 행동조차 이해할 수 있다. 자기는 이제 타인이 될 수도 있는 것 같다.

ㅡ레포트 쓰느라 연산군 말년에 쓴 시들을 봤어. 어머니 나이야 길었든 짧았든 운수일 뿐이고 자기는 타고난 대로 누리며 산다고 썼어. 스스로 가면을 쓰고 춤추기를 즐겨 해서 죽은 자가 우는 시늉을 내면 함께 춤추던 기생들도 따라 울었다고 해.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에 원한을 품었으면서도 죽고 나면 다 끝이니 살아서 행락을 누릴 수 있는 데까지 누리고 볼 일이라 생각했어.

그날, 탕춘대성 밑에서 명우는 성루를 올려다보며 마치 자신이 연산군이라도 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인생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고 살아있을 때만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도덕도, 신념도 아무 의미가 없다. 그저 많이 가지고, 즐겨 쓰고, 쾌락을 누릴 수 있는 만큼 누리면 그뿐일 테다.

ㅡ연산군이 정말로 그렇게 믿었을까.

탕춘대성이 옆에 있는 까닭에 소란이 있던 연극반에서는 해마다 연산군을 무대에 올렸다. 그때마다 반원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연산을 희대의 폭군에 패륜아로 몰아붙이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권문세족의 모함으로 어머니를 잃은 가엾은 피해자로 보는 사람도 있었다.

명우의 말대로라면 연산군은 아무런 생의 이상도 품지 않은, 한갓 쾌락주의자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소란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삶의 앞과 뒤에 죽음이 놓여 있음을 명철히 깨달았다는 점에서 연산군은 분명 허무주의자였다. 하지만 그가 재위 말년에 탕춘대를 짓고 흥청망청 놀이에 빠져든 것은 허무 때문이 아니었다. 허무를 견디게 해줄 버팀목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버팀목 없는 사람은 누구나 가망 없는 퇴폐에 사로잡힐 수 있었다.

소란은 또 명우를 생각한다. 그날 밤에 분명 아무 일도 없었다. 소세지 하우스에서 나와 이곳에 들렀다 고시원 소란의 방으로 숨어든 게 전부였다.

서로 부둥켜안고 평소처럼 정다운 잠을 잤고, 아침에 명우는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ㅡ그런 인간 때문에 사시를 없앤다고 한 거야. 인성 테스트 받으면 낙제할 인간들.

혜리는 자기가 일을 당한 듯 분통을 터뜨렸다. 효은은 어쩔 줄 몰라하며 소란의 기색만 살폈다. 그날 소란은 잠자코 맥주만 마셨지만 결국엔 몹시 취하고 말았다.

소세지 하우스를 나오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날은 마침 일 년 중 해가 가장 짧다는 동지였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려 더욱 울적한 밤이었다.

소란은 탕춘대성 성문 아래 서서 성루를 올려다보았다. 높지 않은 성루가 바로 밑에서는 이렇게 치솟아 보일 수가 없다.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여자가 소란을 힐끗 쳐다보며 지나쳤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 한 분이 저만치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노인에게 길을 비켜주기 위해 소란은 다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리 앞에 표지판이 하나 붙어 있는데,`쉼`이라고 한글로 크게 쓰고 그 밑에`musee shuim`이라고 불어로도 작게 썼다. 쉼은 말 그대로 쉼에 관한 것들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쉰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언젠가 소란은 쉼 박물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ㅡ모든 인간은 누구나 `탄생의 문`을 통과하여 이 세상에 나왔지만 결국 `마침의 문`을 한 번 더 지나가야 한다.

문이라.

그렇다면 사람은 두 개의 문 사이에 놓인 작은 공간 속을 살고 있는 셈이었다. 앞의 문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뒷문 바깥에는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사람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었다.

소란은 표지판을 지나쳐 다리 한가운데까지 천천히 걸었다. 홍제천 냇물은 겨울에도 얼지 않고 졸졸 흐르는 소리를 냈다. 다리 난간에 두 팔을 얹고 소란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달빛에 드러난 북한산 그늘이 아름다웠다. 흰 달빛에, 시냇물을 가로지르는 다리에, 가로등 불빛에, 치솟은 누각에, 흰 성벽에. 오늘밤 탕춘대성은 마치 한 폭의 풍경화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명우는 명우의 길을 떠난 셈이었다. 그렇다면 자기도 이제는 자기의 길을 가야 했다.

그때, 누군가 소란의 등 뒤로 스쳐 지나가는 것 같다. 소란은 인기척을 느끼면서도 돌아보지 않는다. 홍제천 다리 건너 쉼 박물관 쪽으로도 주택들이 있으므로 누군가 밤늦게 귀가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소란의 등 뒤로 걸어가고 있을 그 사람, 소리가 없다.

소란은 문득 머리가 쭈뼛해졌다. 무엇일까. 하지만 소란은 애써 돌아보지 않으려 했다. 집이 아니라면 쉼으로 돌아가고 있는,

<끝>

글 :방민호 서울대교수·국문학

삽화 :한국화가 이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