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의병장 이인영(1868-1909)을 아시는지. 그는 1895년 민비시해와 단발령 등에 반발해 유인석, 이강년과 합세해 춘천과 양구에서 일본군과 항전을 벌인다. 1896년 여름 고종이 의병 해산령을 내리자 문경에 은둔한다. 강원도 원주에서 2천여 의병을 일으킨 이은찬 등이 그를 지휘자로 모시려 간곡히 권유한다. 그러나 그는 부친의 병을 구실로 거절한다.

이은찬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뒤집어지는 천붕지복(天崩地覆)을 당해 국가의 일이 오히려 화급하고, 부자의 은(恩)이 가벼운데 어찌 공사(公事)를 미루려 하시오”라며 결단을 촉구한다. 1907년 7월 25일 그는 부친에게 작별 인사하고 원주에서 의병원수부를 설치한 뒤 관동창의 대장이 됐다. 같은 해 11월에 그는 `13도 창의대진소원수부`를 설치하고 총대장이 된다.

수도진공작전을 펼치던 그는 1908년 1월 28일 부친의 사망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는 허위 군사장을 불러 군무를 위탁하고 총대장직을 사임한다. 삼년상이 끝나면 다시 합세하겠다는 뜻을 알리고 그날로 문경으로 달려간다. 여기서부터 나의 궁금증이 시작한다.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인데, 어쩌자고 그는 영면(永眠)한 부친에게 돌아간 것일까?!

그에 따르면, 부모의 상(喪)을 치르는 것은 나라의 규칙인데 이를 행하지 않으면 불효요, 불효하는 자는 금수(禽獸)와 같아서 신하가 될 수 없으니 그것이 불충이다. 효에서 출발해 충에 이르는 논리가 강직하다. 효자가 아니면 충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가? 내가 알고 있는 한 충무공은 혼군(昏君) 선조의 우행으로 백의종군 하는 길에 어머니의 부음을 접한다. 그러나 그는 모친의 묘소로 달려가지 않는다. 누란지위(卵之危)의 국가를 걱정한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개인의 선택 내지 가문의 논리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우선인지에 대한 사유에서 결과가 달라진 것이다. 동학농민군을 도살(屠殺)하도록 일본군을 끌어들인 민자영의 논리는 왕실이 있고 나서야 국가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효와 가문이 선행돼야 충과 나라가 존재한다는 이인영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국가주의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크고 작음과 무게의 경중을 가늠함에 차이가 남을 지적하고자 함이다. 일본이 막부시대를 거두고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워 명치유신을 단행할 때 앞장섰던 자들은 가문이 아니라 국가를 먼저 생각했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린 손문의 의기는 가문이나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조국과 백성들의 운명과 미래였다. 엇비슷한 시기를 살다간 민자영이나 이인영의 사유와는 한참 거리가 있다.

국정농단으로 촉발된 촛불시위로 광장 민주주의가 살아나고 있다. 농단(斷)의 핵심이나 주변에서 이득을 챙긴 자들의 머릿속에는 국민이나 미래는 아예 없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오직 지금과 여기에서 얻어낼 이권이며, 그것은 오롯 개인과 가문의 이득이다. 나라의 운명이 어찌 되든, 4·16 세월호 대참사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야 어찌 되었든 수수방관(袖手傍觀) 모르쇠로 일관한다. 하기야 승냥이들에게 인간의 도리를 어찌 구하겠는가?!

국민의 함성과 분노로 횃불과 촛불로 일궈낸 민주주의의 결실을 탐하는 자들이 고개 들고 있다. `조중동`은 야권 지도자들을 이간질하느라 눈이 벌겋고, 여기저기 숟가락 올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조만간 종편들도 가진 자들의 편에서 나팔수가 될 것은 자명하다. 그들에게는 조국과 민족과 통일과 미래기획이 없다. 그저 아귀처럼 뜯어낼 고깃점만 있으면 족하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1987년 항쟁과 분명히 다르다. 우리는 30년 전 어리숙한 백성이 아니라, 스마트기기로 중무장한 지식대중이다. 우리는 더 이상 정신 나간 가문과 영혼 없는 개인을 위한 희생양이 아니다. 그러니 명심하라. 그대들, 역사와 민중 앞에 거리낌 없이 침을 뱉는 무리들은 명심하라. 참혹한 응분의 대가가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