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3천여 명의 제자 중에 공문십철(孔門十哲)의 한 명인 자공은 재산을 모으는데 남다른 탁월함이 있었다. 그와는 다르게 묵묵히 스승의 뒤를 따르는 안회는 매우 가난했으나 아성(亞聖)으로 축앙되며 인(仁)에 대한 제 일인자로 인정하였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질문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토론식 수업 방법이다. 질문은 제자들의 능력과 창조의 힘을 심어주고 일깨워내는 탁월한 방법이다. 자상하고 친절한 노파의 가르침은 절대적으로 좋은 가르침이 아니다. 길을 제시하고 생각의 크기를 열어주는 것이 최상의 가르침이라 생각한다. 나를, 뛰어넘는 자를 길러낼 수 없다면 정녕 그것은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단언하고 싶다. 내 자신도 이 부분에서 할 말이 없다

내가 아는 것이 부족하기에 그들에게 새 길을 열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부끄럽다. 나의 글씨와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고 수업을 할 때마다 스스로 도취되어 진행하나 문득 이래도 되는 것인가를 반성한다. 솔직히 대안을 찾지 못해 가다보면 옆길이고 샛길이다. 가르치는 사람의 중대한 병은 자신이 잘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인 것이다.

자공에게 말했다. “너와 안회 중에 누가 더 나으냐” “제가 어찌 안회에게 감히 견줄 수 있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데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입니다.” 공자는 자공의 대답에 만족한다.

자공은 겸손보다 자신을 솔직히 드러낸다. 자공의 대답에 스승은 “네가 안회만 못하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스스로 인정한 것을 더높이 평가한다. 참 아름다운 묘한 광경이다. 어디 이런 사람(제자) 없을까요? 나의 작은 복이겠지요. 어쩌면 내가 준비되지 않았기에 맞이할 수도 없다.

이 질문의 핵심은 사실 인(仁)에 대한 물음 척도였지 능력에 대한 척도는 아니라 지식과 지혜에 대한 물음에 답인 것이다.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아는 것의 차이인 것이다.

`사자교인(獅子咬人)`이라는 말이 있다. “흙덩이를 던지면 쫓는 것은 똥개이고 던진 사람을 무는 것은 사자새끼라”는 말이다. 될 놈은 알 수 있다라는 무서운 말이다. 작은 차이가 천지차이다. 신심명에서도 “호리호차면 천리현격”이라 하지 않았던가. 서예글씨 공부도 마찬가지다. 필법에 맞게 쓰고 법의 구속을 벗어나면 언젠가는 인위적인 극을 넘어서 자연에 이를 수 있다. 법은 인간이 지켜아 할 최소한의 도덕이며 서법도 글씨 쓰는 사람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약속이다

공부하는 도반들은 스스로 재주 있다, 없다 하면서 스스로 물러설 궁리만 한다. 서로 신뢰하고 믿고 따르는 것만이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위대한 일이다. 30대초반의 나이에 애제자 안회가 죽자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하는 공자의 통곡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