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 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 인문학부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수많은 언론 매체에서 클린턴 당선을 예측했으나 결과는 대반전이었다. 막말과 추문으로 얼룩진 트럼프 후보가 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한국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인종 차별주의자, 공격적인 성충동과 무분별한 돌출행각으로 악명 높은 트럼프가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이 된 것이다. 미국은 물론이려니와 유럽 여러 나라도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상의 충격을 경험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허다한 매체와 선거 전문가들이 트럼프의 당선 이유를 분석하고 있다. 뒤집어 생각하면 어째서 클린턴이 패했는가, 하는 문제를 천착하는 셈이다. 재선(再選) 대통령의 아내이자, 국무장관 경력의 클린턴이 질래야 질 수 없는 싸움에서 무참하게 깨진 원인을 생각한다는 얘기다. 그 가운데 나는 딱 한 가지만 제시하고자 한다.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은 강력한 맞수의 대결이라는 구경거리를 선사했다. 버니 샌더스와 힐러리 클린턴의 후보경선이 그것이다. 재벌집안 부럽지 않을 정도의 재산과 억 소리 나는 강연료 수입, 월 스트리트와 밀착한 후보 클린턴. 서민 출신이자 변변찮은 정치적인 경력과 노령(齡)의 악재를 딛고 후보에 도전한 샌더스. 민주당 경선은 가진 자들을 대변하는 클린턴과 사회적 약자를 대표하는 샌더스의 충돌로 연일(連日) 화제를 모았다.

경선의 승자는 클린턴이었다. 그 이후 민주당 샌더스 지지자들은 냉담해지기 시작한다. 부동산 재벌 트럼프와 부부 강연재벌 클린턴 사이의 차이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월 스트리트의 큰 손들에게 정치자금을 받는 클린턴을 지지해야 할 어떤 명분도 의지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의 차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크지 않다. 정당보다 후보자 개인의 미덕과 장점이 선거판에 영향을 미친다.

지난 미국 대선의 투표율은 56.9%였다. 43%에 이르는 미국인 유권자가 선거에 불참했다는 얘기다. 트럼프는 투표권을 가진 미국인 전체의 30%도 안 되는 지지를 받고 대통령이 되었다는 얘기다. 어째서 이렇게 취약한 대표성만을 확보하게 되었을까. `진흙밭의 개싸움(泥田鬪狗)`처럼 진행된 선거 국면에서 민주당 지지자들은 끝없이 표류하고 흔들렸다. 왜 클린턴을 찍어야 하는지,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한 이들은 투표에 대거 불참했다.

이 지점에서 2002년 한국대선을 떠올려보자. 당시 대세론의 이회창 후보와 무명(無名)의 노무현 후보가 맞붙었다. 노무현은 정몽준과 후보단일화를 성사시킨다. 그러나 투표전날 밤 정몽준은 단일화를 철회한다. 그 순간부터 휴대전화에 불이 나기 시작한다. 거리에서 정몽준을 한 시간 기다렸다 빈 손으로 돌아서는 노무현의 얼굴에서 지지자들은 강력한 위기감을 확인한다. 그리하여 밤새 휴대전화로 투표를 독려하기에 이른다.

선거란 후보자가 얼마나 많은 지지자들을 투표소로 나오게 하느냐에 성패가 달려있다. 한 표라도 더 얻는 사람이 독식하는 현행 선거법 아래서는 이런 상황이 가속화한다. 하지만 클린턴에게는 민주당 지지자들을 투표소로 불러 모을만한 아무런 매력도 동력(動力)도 없었다. 그저 나이 들고 욕심 많은 여성 정치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트럼프에 대한 공포도 지지자들을 결집시키지 못했다. 패배는 정해진 것이었다. 클린턴의 교훈이다.

한국에서 불타오르는 광장 민주주의를 보면서 국민들이 가진 위대한 역량과 미래 가능성을 확인한다. 저렇게 성숙한 시민의식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우리 후손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안도감마저 든다. 우리는 너와 나의 경계를 넘어 새롭고 깨끗하며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곧 닥쳐올 한겨울 칼바람을 이겨낼 우리 국민들의 든든하고 미더운 정치의식에 고개 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