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재현<br /><br />편집국장
▲ 임재현 편집국장

기억 속에 두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다. 한번은 대학 신입생 시절,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의 아들과 그 친구인 `동네 형님`들을 따라 엉겁결에 인천 영종도에 놀러가서 한밤중 텐트 속에서 태풍을 만났을 때이다.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서기 전 허허벌판이던 그곳에서 재난에 무감한 풋내기들은 하필이면 그 위험한 바닷가에서 여름밤의 낭만을 즐기려다 모조리 참변을 당할 뻔했다.

지난 1주일 사이 여느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처음 경험한 지진의 공포는 세번째 고비라고 할 만했다. 문제는 다음 재앙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가항력이라는 데 있다. 언론은 재난이 발생하면 대피 행렬의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한다. 지난 12일 지진에 급히 차를 몰아 신문사로 돌아오는 길은 영화에서 보던 상황이었다. 꽉 막힌 길을 빠져나가야 하는 부담과 가족에 대한 걱정. 순간 나 자신을 뉘우쳤다. 일본 대지진 당시 텔레비전을 보면서 `침략주의 역사의 인과응보이겠거니`하며 동병상련의 감정이 옅어지던 기억 때문이다. 내가 겪어봐야 비로소 아픔을 안다는 건 인간성의 숙명적 한계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어리석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진의 위력 앞에 선 순간 초라함과 희로애락의 덧없음을 절감했다. 저 화려한 불빛의 도시도 지진 앞에서는 한낱 재앙의 아수라장이며 흉기나 다름없다는 자각이다. 일본인 특유의 절제된 언행과 생활태도는 어찌보면 재난을 늘 옆에 두고 사는 현실의 결과요 적응을 위한 선택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온갖 재난에도 유독 지진의 경험만은 무지나 다름없던 한국은 역시 무기력했다. 아파트 등 건물에서 벗어나 평지로 대피하라는 지자체의 차량방송은 있었지만 그 다음 행동요령은 `알아서 하라`였다. 과거 출입했던 시청의 담당직원에게 전화를 하니 “국민안전처 등 정부 어디에서도 전화 한 통의 연락조차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답답하다”는 푸념이었다. 시계를 보니 10시45분, 첫 5.1 지진 후 무려 3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초가을 날씨에 아직도 학교 운동장에서 떨고 있는 시민들이 있는데도 연속극만 틀어대는 국가재난공영방송도, 정부도, 지자체도 요령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들도 몰랐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이 지경까지 왔나, 종편의 그 많던 입과 전문가들과 언론은 무얼 했나? 그, 뼈 빠지게 일해서 바친 세금이 도대체 어디로 갔길래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기는 커녕, 암흑 속의 길거리를 헤매게 하는가 라는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여성들이 겪은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어느 책에 헤세를 인용한 글이 있었다.`전쟁은 우리들 모두가 지나치게 게으르고, 지나치게 안이하고, 지나치게 비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전쟁`을 `지진`으로 바꾸니 하나도 틀릴 게 없었다. 국민이 권리 위에서 잠자고 언론이 겉똑똑이 노릇을 하고 공직자가 무사안일의 제복을 입고 저마다 갑질에 폼을 잡았으니 이런 망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후 1주일 동안 호된 여론의 질타를 받고 나서야 19일 대처는 학습효과가 옅보였다.

언론인인 데보라 포터와 국제문제전문가인 셰리 릭카르디가 지은 `취재기자를 위한 재난보도 매뉴얼`은 남미에서 발생 가능한 최악의 재난을 10가지로 꼽았다. 폭력(테러 등), 사고(원전과 산업재해 등), 산사태, 화산, 홍수와 가뭄, 기후변화, 쓰나미, 열대성 폭풍과 허리케인, 질병, 그리고 지진이다. 이 가운데 지진은 도시화로 인해 그 여파가 더욱 심각해질 재앙으로 정리돼 있다. 당장 도시를 떠날 수 없는 시민들은 이제 새로운 생활패턴에 적응해야 한다. 저준위방폐장 외에도 국내 원전의 83%가 밀집한 영남 동해안 주민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SNS를 탄 어느 글귀를 기억해야 한다. “그냥 죽어도 좋으니 제발 팔 다리가 낑겨 고생하지만 않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