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형<br /><br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요 며칠 간의 날씨를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를 들라면 필자는 주저하지 않고 “훅”을 들 것이다. 전국을 절절 끓게 만든 폭염이 “훅” 갔다. 그리고 가을이 “훅” 왔다. 계절의 변화를 준비할 시간도 없이 훅 가고 훅 와버렸다. 훅 떨어진 기온에 은행잎들이 노랗게 질렸다. 곧 맨몸을 드러내야 하는 나무들이 부끄러움에 붉게 물들 것이다. 그럼 올 한해도 다 가고 만다. 김영랑 시인은 이런 상황을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 삼백 예순 날 하양 섭섭해 우옵네다”

빠름에 중독된 인간들 때문에 자연까지 빨라지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이다. 자연은 늘 완충 시간을 두어 인간들에게 변화에 준비할 시간을 주었다. 그런데 최근 자연현상을 보면 빨라도 너무 빠르다. 단 며칠 만에 여름과 가을이 자리를 바꾸었다. 정말 이대로 가다간 하루, 아니 몇 시간을 두고 계절이 왔다 갔다 할지도 모른다. 비가 한 번 왔을 뿐인데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던 날씨에 대한 보도가 마치 먼 과거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침과 밤 기온은 싸늘하다 못해 차다. 이젠 창문을 열어 놓고 잘 수가 없을 만큼 새벽은 춥다. 이 모든 것이 불과 며칠 상간에 일어났다.

계절과 속도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면, 아마도 여름은 빠름의 계절일 것이다. 빠르지 않으면 모든 것이 이글거리는 태양에 타버릴 것만 같은 계절이 여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살기 위해 “빨리 빨리”를 외치며 한여름을 광속으로 살았는지 모른다. 그런 여름이 정말 빠르게 갔다. 그리고 세상이 제대로 숨 쉴 수 있는 가을이 왔다. 여름이 빠름이라면 가을은 느림이다. 올 가을은 진정으로 느림의 계절이 되어 우리가 한여름 동안 잊고 살았던 것들을 다시 생각했으면 좋겠다.

밀란 쿤데라는 느림과 기억 사이, 빠름과 망각 사이에는 어떤 내밀한 상관관계가 있으며,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고 하였다. 올 여름 어쩌면 사람들은 정말 잊고 싶은 것이 정말 많아 빠르게 살았는지도 모른다. 돌아가는 국내외 정세, 특히 정치, 경제, 교육 등을 보면 분명 사람들은 제정신으로는 살 수가 없다.

9월을 열매달이라고 한다. 자연은 호들갑 한번 떨지 않고 그 뜨거운 여름을 견뎌냈다. 한 여름을 견뎌낸 나무들이 가지마다 결실을 주렁주렁 달았다. 논밭에는 오곡백과들이 익어간다. 자연은 사람들에게 말한다, 제철에 맞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라고. 이기려고 애쓰다가 실패하면 지고 말지만, 견뎌내려다 실패하면 참고 마음을 추슬러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또 사는 것은, 그리고 관계라는 것은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라, 참고 견디는 것이라고 절절 끓는 여름을 잘 견딘 자연이 말한다. 하지만 이기기 위해 사는 인간들은 또 싸우기 바쁘다.

속도를 나타내는 표현 중에 소설가의 속도라는 것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걷는 것보다는 빠르고 자전거로 달리는 것보다는 느린 상태를 소설가의 속도라고 하였다. 소설가들이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이 속도에 맞춰 삶을 관찰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응용하여 어느 방송작가는 “시인은 걷는 사람보다 더 느린 사람, 아예 걷지도 않고 먼 곳에서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시인이 세상에 대해 절대적 통찰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시인의 속도 때문이라고.

우리는 알아야 한다, 정말 이대로 가다간 이 나라도 한방에 훅 간다는 것을.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시인의 속도를 배워야 한다. 그래서 한 발 떨어져서 조금 느리더라도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그럴 때만이 사드(THAAD) 때문에 애꿎은 머리만 밀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