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보고 사는 글귀가 있지만 실천에 옮기기가 힘들다는 것을 느낀다.

“명예와 이익은 성인도 능히 이겨내기 쉽지 않다”라는 장자의 글귀이다.

얼마전 예술단체장 출마를 앞두고 찾아온 친구에게 해준 말이기도 하다. 이겨내기 쉽지 않은 이유는 분명 이익 앞에 의롭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의를 바탕에 두고 예로 행동하고 겸손과 신뢰로서 살아가면 모든 것은 대부분 이루어진다.

의(義)도 예(禮)도 이익(利)도 실천하고 지키기 쉽지 않기에 늘 강조되는 말씀이다. 특히 이익 앞에서의 의로움은 너무 어렵다. 이익 앞에 자유로운 자는 세상에 귀하디 귀하다. 많은 사람들이 잠방이 속에 들어 이익과 향락에 만족하여 다투고 시기하고 모함하다 한 세상을 마친다.

한자의 어원상으로 의(義)는 양(羊)과 아(我)의 구성으로서 我는 들쭉날쭉한 톱니 바퀴 형상으로 희생양을 날붙이로 잡는 모양이며 엄숙한 의식에 맞는 거동의 뜻이다. 들쭉날쭉 세상 사람들을 내 것으로 끌어들이는 형상이다. 義란 이치에 맞도록 통제되어 사사로움에 빠지는 일이 없이 객관적이고 합리적 자세이다. 외적인 발휘의 모든 행위와 표현을 바르게 하고 義에 바를 정(正)을 더하면 이 시대의 진정한 화두 정의가 된다. 공자께서도“사람은 의로움을 바탕으로 하여 행동 하나하나가 예절과 겸손을 하게 하며 성실로써 완성한다”하셨다.

의로운 행동이 예절에 맞아야만 주변에 공감을 얻을 수 있고 힘이 되고 본이 되며 겸손해야만 백곡의 왕이 된다라고 노자는 말씀하셨다. 하나를 알면서 자신의 앎을 정의롭지 않게 드러내고 나타내는 일은 예로부터 칭찬의 대상이 아니었기에 말로서 바위를 끄덕이게 할 수 있어도 그것은 능히 선한 일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자로가 물었다. “군자도 용기를 중요하게 생각합니까”라고. “군자는 정의를 가장 중하게 생각한다. 만약 군자가 용감만 하고 의롭지 못한다면 난을 일으킬 수 있다. 또한 소인에게 용기가 있고 정의가 부족하다면 도둑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분별없이 날뛰는 헛된 용기는 정의를 저버린다. 곧 만용이랄 수 있다. 정의 실행에는 자신의 내공속에 갖추어진 용기가 있어야 한다. 양화(陽化)편에 “용기는 정의를 바탕으로 할 때 힘을 발휘할 수 있고 정의로운 바탕이 없는 용기는 오히려 남에게 피해를 준다”라고 말한다.

정확히 알지 못함에서 일어나는 실행은 주변을 곤궁으로 몰고 들어가는 문이 된다. 옳은 사람은 용기를 자신의 준비된 속에서 찾지만 소인배들은 남들의 부추김과 무지에서 찾는다.

젊은이들에게 “젊음은 다시 오지 않는다. 벼슬자리는 어쩌자고 의롭지 않은 부귀는 뜬구름”이라고 말씀하셨다.

義는 오상의 하나이면서 사람이 지켜야 할 반듯한 준칙이며 우리에게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옳고 의로운 도리인 바른 길이다. 이러기에 세상은 의(義)를 맨 위에 올려놓았다. 한 번만이라도 의로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가을 아침이길 바란다.

솔뫼 정현식<서예가·솔뫼서예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