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1주년 잊혀진 미주 이민 1세대를 찾아서
⑶ `농업DNA`·`King(킹)`으로 불린 한인들

▲ 중부 캘리포니아 리들리시 근처의 농장에서 재배돼 미 전역에 유통되고 있는 넥타린(Nectarine)은 미주 한인 최초의 백만장자 김형순이 개발한 미국 원산의 천도복숭아다.
▲ 중부 캘리포니아 리들리시 근처의 농장에서 재배돼 미 전역에 유통되고 있는 넥타린(Nectarine)은 미주 한인 최초의 백만장자 김형순이 개발한 미국 원산의 천도복숭아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벼농사 중심의 농업국가이다. 봉건주의 조선을 지탱한 양대 축은 이데올로기로는 유교(儒敎)요, 산업에서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으로 상징되는 농업이었다. 조선시대에 조정이 세종대에 농사직설, 효종대에 농가집성, 숙종대에 산림경제 등 국가적인 농법서 편찬사업을 대대적으로 시행한 것은 애민(愛民)의 발로이면서도 국부를 도모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조선의 백성은 모두 군사로 육성한다는 국가적 목표 아래 군역에 고통받기도 하고, 세원(稅原)으로서 농토에 붙박혀 떠날 수가 없는 `가렴주구`, 수탈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농업이야 말로 한반도의 백성에게는 가족을 먹여살릴 하늘과 다름 없는 쌀을 생산하는 중요한 기술이었기에 끊임 없이 매달려 궁리한 결과, `농업DNA`는 한국인의 한 특성이 됐다. 망국의 한을 안고 태평양을 건너던 미주 이민 한인 가운데 농업으로 대륙에 이름을 아로새긴 명사들이 수두룩하게 배출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경남 통영출신 통역관 김형순
미국의 천도복숭아 개발 성공
`김형제상회` 설립 美전역 판매
독립운동·구호사업에도 헌신
동업자 김호, 해방 후 애국가 소개

숙주나물 통조림으로 富 일군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 박사
`라이스 킹`으로 알려진 김종림도
성공한 초기 이민 한인 이름 올려

□ 미주 최초의 한인 백만장자 김형순

캘리포니아 리들리와 다뉴바 일대에 드넓게 펼쳐진 과일농장을 지나다보면 우리나라의 국도변처럼 생산자들이 운전자를 상대로 직거래를 하기 위해 세워놓은 입간판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넥타린`(Nectarine)이라는 생소한 과일이름도 찾아볼 수가 있는데 바로 `미국의 천도복숭아`다.

미국인들이 `털 없는 복숭아`로 부르는 이 신품종의 개발자는 경남 통영 출신의 김형순(Harry S. Kim, 1886~1977)이다.

통역관으로서 1903년 첫 이민선 갤릭호를 탄 그는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본토에 입국한 다음 1916년 리들리에 정착해 대학교수의 도움으로 넥타린을 개발했다. 미국인들은 복숭아의 잔털에 특히 알레르기가 심하다는 점에 착안한 그는 조선의 천도복숭아를 염두에 두고 복숭아와 자두를 육종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처음에는 묘목을 판매하던 김형순은 아예 `김형제상회`(Kim Brothers, Inc.,)를 통해 미 대륙 전역에 넥타린을 판매함으로써 미주 한인 최초의 백만장자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 인천 월미도의 한국이민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김형순 관련 기념물.
▲ 인천 월미도의 한국이민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김형순 관련 기념물.

초기에 하와이를 거쳐 본토에 입국한 한인들은 처음에는 주로 `철새노동자`로서 수확철마다 리들리와 다뉴바에 거주했다. 김형순이 김호(본명 김정진, 1884~1968)와 공동설립한 김형제상회라는 든든한 언덕은 리들리에 한인 타운이 형성되는 계기가 됐다. 두 김씨는 조국을 위해 해방 전에는 독립운동을, 후에는 구호사업에 헌신했다. 현재 리들리시에 남아 있는 옛 한인장로교회(현재 멕시코교회)는 김형순이 기부한 대지 위에 한인들이 1938년 직접 건립했다. 한국전쟁 중에는 미국인교회와 라이온스클럽에서 기금과 구호물자를 지원받아 전쟁고아와 난민을 도왔다.

이번 취재에서 확인한 그의 대저택은 사후 40여년이 지났으나 옛 주인의 명성을 확인케 해주는 건축물이었다.

반면 그의 동업자였던 김호의 저택은 길건너편에 단촐한 규모로서 소박한 성품을 짐작케 해줬다. 그는 한때 여운형과 친분을 맺었으며 배재와 이화학당에서 수학, 물리, 영어교사를 지내고 도미해 해방 후에는 한국에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를 소개한 것으로 전해진다. 2006년 로스앤젤레스 한인 타운에 그의 이름을 딴 초등학교가 세워졌다.

 

▲ 인천 월미도의 한국이민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김형순 관련 기념물.
▲ 인천 월미도의 한국이민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김형순 관련 기념물.

□ 유일한 박사도 농업으로 성공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1895~1971)박사는 근검과 성실, 투명 경영과 사회헌신을 위한 기업가 정신을 실천함으로써 한국의 기부문화에 원조격의 모델이 돼 왔다. 하지만 그가 도미 역정의 초기에 미국에서 생소한 숙주나물로 부를 일군 사실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유일한은 1922년 숙주나물 등을 통조림에 넣어 파는 라초이회사를 설립해 6년 만에 자산 200만 달러 규모의 회사로 키워 `숙주나물 킹(King)`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라이스 킹`(Rice King) 김종림(1884~1973)은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다. 1907년 23세에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 그는 철도 노동자로 일하다가 가주로 이주해 1914년 벼농사에 뛰어들었다. 당시 쌀을 재배하지 않던 가주였지만 1차 세계대전 발발로 수요가 폭증해 연간 8만 달러(현재 가치 100만 달러)를 벌 만큼 거부가 됐다. 그가 1920년 2월 북가주 윌로우스 지역에 5만 달러(현재 가치 60만 달러)를 기부해 창설한 `한인비행학교`는 대한민국 공군의 뿌리가 됐다.

이민선조를 기리는 재미 한인들

`리들리의 마지막 한국인` 로버트 김
버려진 한인묘지 발견 뒤 외부에 알려

김명수 재미 중가주 해병대전우회장
24년째 매년 2차례 한인묘지 헌화봉사

한인들의 미국 이민사에서 중요한 장을 차지하고 있는 중가주 초기 한인들의 숨겨진 역사는 피와 눈물로 얼룩졌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고국(故國)의 역사연구와 추모사업에서 소외돼 왔다. 이들이 세상에 조금씩 알려진 계기는 스스로 이민 길의 험로를 경험했기에 타국의 묘지 한켠에 쓸쓸하게 방치돼 있는 이민선조들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주머니를 털어 조촐한 헌화에서 시작해 추모사업으로 발전시켜온 한인 후예들의 노력 때문이었다.

지난 6월13일 로스앤젤레스시 써니힐스 양로원에서 만난 로버트 김(김경옥·93·사진)은 `리들리의 마지막 한국인`으로 불릴 만큼 중가주 한인사의 산증인이다. 그의 부친 김유호는 1903년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에 첫 입도한 최초 이민자이다. `사진결혼`부부의 이민2세인 그는 귀국을 선택한 아버지에 의해 식민지 조선에서 중국을 거쳐 미군속으로서 패망한 일본, 다시 하와이를 거쳐 본토에 이르기까지 한동안 부침의 세월을 보냈다. 그는 1960년경 리들리에 정착해 인접한 다뉴바의 학교재단에서 회계행정 담당으로 22년간의 직장생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그 결과 리들리와 다뉴바의 주류 사회에서 인정받는 인사가 됐으며 김형순과 김호 등 한인 명사들과 많은 일화를 나누는 사이가 됐다. 그가 이민선조들의 역사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이사 직후 그의 아내가 집 근처의 묘지를 산책하면서 비롯됐다.

“하루는 아내가 집으로 막 울면서 들어왔어요. 미국인들의 공동묘지 한구석에 낯선 이름들이 있어서 읽어보니 같은 한국사람이라는 거예요. 묘비에 부인이 없는 사람들도 많고. 그래서 함께 집 정원의 꽃들을 꺾어서 무덤마다 헌화하기 시작했지요.”

 

▲ `리들리 한인 이민역사 기념각`에는 서울 독립문의 축소 모형과 함께 김형순, 김호, 김종림, 한시대 등 초기 이민 한인 가운데 주로 농업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10명의 업적을 기념하고 있다.
▲ `리들리 한인 이민역사 기념각`에는 서울 독립문의 축소 모형과 함께 김형순, 김호, 김종림, 한시대 등 초기 이민 한인 가운데 주로 농업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10명의 업적을 기념하고 있다.

그는 1남2녀의 자녀를 모두 성공시키고 부인이 작고한 뒤 LA의 양로원에 홀로 거주하고 있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성성한 눈빛과 완벽에 가까운 한국어가 인상 깊은 로버트 김은 “죽으면 리들리에 묻히고 싶지만 가족묘가 있는 하와이로 가야 할 것 같다”며 “학생들에게 한국의 역사를 철저하게 가르쳐달라”고 당부했다.

로버트 김의 오랜 임무는 김명수(76) 재미 중가주해병대전우회 회장에게 이어졌다. 해병대 97기인 그는 1987년 12월 LA로 이민해 의류사업 등에 종사하던 중 1992년 2월 로버트 김과 함께 리들리묘지를 첫 방문했다. 이후 미국의 메모리얼 데이와 8·15광복절 등 매년 2차례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조국의 관심도 없이 요즘도 종이에 직접 태극기를 그려 넣어 189기의 무덤에 꽂고 있다.

김명수씨는 “저 무덤에 누워 계신 이민선조들은 모두 자갈밭을 개간하신 분들”이라며 “그 위에 지금 우리가 씨를 뿌리고 있으며 수확의 열매는 우리의 후손들이 누리게 될 것이며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글·사진/임재현기자 imj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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