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락<br /><br />대구 효산요양병원장
▲ 이원락 대구 효산요양병원장

오늘도 요양병원 중환자실에서는 누군가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어느 나이 많은 노인이 몰아쉬던 숨을 거두어들인 것 같다. 신이 허락해 주신 기간을 다 채우고, 이제는 신에게 그의 인생 족적을 보고하러 떠나 가버린 모양이다.

산다는 것은 피로, 고난, 괴로움, 좌절 등이 동반되는 험난한 과정이다. 그러나 죽어서 신에게 신고식을 할 때 우리는 인생 전체를 그럭저럭 또는 어처구니없이 살아왔다고 보고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지하게 삶을 살지는 못했을 지라도 최소한 사는 동안 계속해서 악을 행하거나 그냥 시간을 낭비하면서 흘려보내지는 말아야 한다. 삶을 끝내고 신을 만날 때 성실치 못한 인생에 대해 후회의 양을 줄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 때는 신에게 어리광을 부리면서 선처해 줄 것을 청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젊은 시절에는 힘차게 살아간다. 그러나 살아갈 기간이 줄어든 노인이 되면 혈기보다는 이성적으로 변한다. 그러다가 보행이 둔해져 감에 따라 그들은 생업 활동을 줄여서 점차 삶을 단순화시켜 간다. 늙어 가면 갈수록 더 많은 인생 과업을 포기해 나간다. 거기에 따라 가지고 있던 가치관이 점점 더 변하게 된다.

사람들 대부분은 평소에는 자신의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다가 임종 근처에 가서야 비로소 삶의 이유를 어렴풋이 깨닫는 경우가 많다. 살아가는 전체 기간이란 죽은 이후에 만나게 될 자기의 영원성을 위하여 준비해 나가는 시간이 된다. 이것은 인생이란 `영원 속에서는 어떤 상태로 되어 있어야 하나?`를 생각하여 시행하려는 긴 과정이라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누구에게든 죽음은 막연하게 미래 언젠가 나타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니고 반드시 나타나서 경험해야 할 사건이다. 그래서 힘들게 살아와서 죽음 앞에 섰을 때 영원한 생명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늙어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시간이 흘러가면 갈수록 자기 인생이 붕괴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생각으로 모두가 우울감에 빠져든다. 이때쯤 갖게 되는 `죽은 이후`를 긍정적으로든 또는 부정적으로든 보는 관점에 따라 각자의 영혼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달라진다. 부정적인 시각은 종말의 시간을 의미하기 때문에 좋지 않다. 이런 시각을 가진 자는 생각하는 방향을 수정하여서 지금 이 시간을 영원으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

죽음을 앞두고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들은 대단히 많다. 그 중에서 정신적으로는 외로움과 고립, 우울, 후회, 절망 등이 있고 그리고 신체적으로는 전신이 쑤시고 아픈 몸이 있다. 육체는 진통제로 다스리겠지만 이런 어두운 정신세계를 극복하려면 그런 힘은 `사랑과 피부접촉`으로만 가능하다.

즉, 죽음을 앞에 두고 살아가는 자의 삶에 대한 감회는 만났다가 작별하는 인사를 통해서도 상대편 사람들의 생각 속으로 녹아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때로는 말보다 가벼운 신체 접촉이나 미소가 상대에게 그의 순수한 마음을 더 잘 전해 주기 때문이다.

인간이 죽음과 마주한다는 것은 영적인 세계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다. 그러기에 얼마 남지 않은 임종에 도달할 때까지 인간의 평소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영원을 생각할 것을 스스로에게 권한다. 이렇게 생각하도록 하는 권유를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지혜와 자비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이나 용서, 감사, 공유, 긍정하는 마음 등을 갖도록 더 많은 영향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