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1주년 잊혀진 미주 이민 1세대를 찾아서
⑴ 망국의 백성, 또 다시 이민의 길에

▲ 미국 중부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초기 한인 이민자들이 안장돼 있는 리들리시의 묘지.

지난해 대한민국을 뒤흔든 `국정교과서` 논쟁은 보수와 진보로 갈린 우리 사회의 민낯을 다시 한번 확인나는 계기가 됐다. 그 와중에서 역사학계에는 1980년대 중반의 민주화 바람을 타고 우리 독립운동사의 초점이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진보 계열과 무장투쟁사에 집중돼 왔다는 자성론이 일기도 했다. 동시에 미주지역을 비롯해 상대적으로 소외돼 온 해외독립운동사에 대한 연구와 기념사업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본지는 5회에 걸쳐 지난 1903년 1월 하와이 행으로 시작된 미주 한인 이민 1세대의 역사를 재조명한다. 이는 한국 독립운동사와 이민사를 함께 살피는 동시에 총인구의 5.5% 시대를 맞는 다문화의 한국사회에 또 다른 이정표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체성의 상징으로서 `농도`(農道)와 `항일`(抗日)을 내세우는 경북에는 역사의 또 다른 뿌리 찾기이기도 하다. /편집자주

103명 태운 공식 첫 이민선 갤릭호
1903년 1월13일 호놀룰루에 입항
2년동안 美 이주민 7천500명 달해

도시선 철도·탄광 등서 중노동
캘리포니아선 농장서 주로 일해
영어 서툴고 정착 제대로 못한
상당수 노동자들 독신으로 생 마감
매월 수입 10% 독립운동에 보태와

대구·경북 중 경주 이민자 수 `최다`
1928년 결성 `영남부인회` 활동
하와이 이민사회 경북위상 가늠케해


□ 미국 본토 이주의 계기

공식적인 첫 이민선으로 기록된 갤릭호가 최초의 미국 `포와`(조선인들의 당시 하와이 지칭) 농업 이민자 103명을 태우고 호놀룰루에 입항한 날은 1903년 1월13일이다. 이들 가운데 검역소 신체검사에서 합격돼 사탕수수 농장에 배정된 인원은 86명, 나머지는 다시 귀국하게 됐다.

`구한말 한인 하와이 이민`(인하대 출판부)와 `경북독립운동사`(안동대 안동문화연구소) 등 문헌에 따르면 하와이 이주는 조정과 미국 알렌 공사가 개입해 시작됐다가 일제의 압력으로 1905년 8월 막을 내리기 까지 모두 7천500여명을 내보냈다. 초기 하와이 이민자들의 형편은 일본이 개입한 사기 브로커들에게 속아 1905년 멕시코 유카탄반도의 애니켄농장으로 팔려간 1천55명의 동포에 비해서는 다소 나았다. 하지만 이들 역시 배삯을 선금으로 대신 지불한 농장주들로부터 착취나 다름 없는 노동과 주거 여건 아래 고통에 시달렸다.

인천광역시는 국내 공식 이민의 첫 출발지답게 지난 2008년 한국이민사박물관을 개관했다. 박물관에는 지난 1905년 5월28일 남편과 함께 몽골리아호를 타고 불결한 선실과 멀미의 고통 끝에 호놀룰루항에 입항해 다시 마우이의 사탕수수농장에서 힘겹게 살아간 함하나 할머니의 증언이 기록돼 있다.

 

▲ 인천광역시 월미도 소재 한국이민사박물관 내부에 기록된 초기 하와이 농업이민자 전원의 이름.
▲ 인천광역시 월미도 소재 한국이민사박물관 내부에 기록된 초기 하와이 농업이민자 전원의 이름.

`배 속에서 … 둘이 열흘을 굶고 있으니 기운이 하나도 없어. 대한땅에서 가져온 삼이라는 약을 가져온 거 … 칼로 갈아 가지고 물 떠다가 그거 한 갑씩 물 먹고 삼가루 조금 타가지고 먹기를 한 주일반 열흘 동안 먹고. 호놀룰루 오니깐 머리가 흔들흔들.…`

이들은 오늘날 250만명으로 불어난 미국 한인사회의 이민 1세대 선조이다. 하지만 오늘의 역사는 당시 7천500여명의 공식 이민자들이 계약 기간이 끝난 뒤 어떤 길을 걸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다. 과연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여러 근거를 종합하면 1904~1905년부터 `상항`(샌프란시스코)을 통해 본토에 입국한 하와이 이민 1세대는 2천11명에 이른다. 그리고 절반 가량이 하와이에 정착했으니 조선으로 귀국한 인원은 1천500~2천여명에 불과한 것으로 전해진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의 즈음에 망국민의 신세는 그들이 또 다시 이민의 길에 나서도록 운명의 등을 떠밀었다.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입국한 조선인들은 농업에 종사한 직업적 한계로 인해 도시에서는 주로 점원이나 잡역부로 밖에 취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 철도 건설현장이나 탄광의 중노동을 택했다. 나머지는 샌프란시스코 아래의 농업도시인 프레즈노 일대 중부 캘리포니아(중가주)로 유입돼 농장의 임노동자로 고용됐다.

한때 미 중가주 한인 이민사의 중심, 리들리와 다뉴바는 이제 역사의 기억에서 거의 잊혀져 있지만 북가주의 중심인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로 대표되는 남가주의 사이에 위치해 당당히 한획을 긋게 된다.

 

▲ 한인 이민자들이 주로 `철새 노동자`로 일한 복숭아 농장.
▲ 한인 이민자들이 주로 `철새 노동자`로 일한 복숭아 농장.

□ 중가주의 잊혀진 초기 한인이민사

지난해 한국에는 지난 1920년 전 세계에서 최초로 열린 3·1운동기념식을 담은 해외 기록영상이 소개돼 반향을 울렸다. 1919년의 3·1운동이 일제에 의해 짓밟힌 뒤 해외의 동포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것이다. 당시 역사의 무대는 바로 다뉴바라는 생소한 미국의 소도시였다. 영상 속 한인들은 주로 양복 정장을 한 남성과 달리 여성들은 한복의 대용인 듯 간호사 차림의 흰옷을 입고 당당한 모습이었으며 말과 자동차에 탄 한인들은 상당한 규모의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었다.

당시 리들리와 인근의 다뉴바에는 캘리포니아 한인의 3분의 1이 거주할 만큼 세력이 컸다. 하지만 이들은 시간당 20~30센트의 임금을 받으며 지금의 멕시칸들처럼 과일과 채소농장에서 고된 노동을 하며 월생활비 10~15달러의 신세였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한인 미국이민 100주년을 기념해 지난 2003년 펴낸 `미주지역 한인이민사`에 따르면 이들의 일은 작업조건에 따라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철새 노동자`로서 영어에도 서툴러 상당수가 독신으로 생을 마감했다.

1920년대 이후 미주 한인사회는 `독립의연금, 공채금, 혈성금, 국민부담금, 독립금` 등의 이름으로 최소 100만 달러 이상을 모금해 상해임정 등 아시아와 구미 각지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들은 정든 고국산천과 부모형제를 떠나 이역만리에서 망국민 이민자의 생활을 하면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매월 수입의 10% 가량을 주저 없이 바쳤다. 앙숙이었던 이승만과 안창호가 경쟁이라도 하듯 `조국독립`의 명목 아래 이들의 호주머니를 찾아다닌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 1903년 1월 인천 제물포항에서 출항해 호놀룰루항에 입항한 최초 하와이 이민선 갤릭호의 모습.
▲ 1903년 1월 인천 제물포항에서 출항해 호놀룰루항에 입항한 최초 하와이 이민선 갤릭호의 모습.

□ 이민자 수, 대구·경북이 세번째

`구한말 한인 하와이 이민` 등 각종 근거에 따르면 하와이 이민자 7천500여명 중 대구경북 출신자는 세번째 규모이다. 총 7천519명으로 산정한 자료에 따르면 경상도는 676명으로 경기도 906명, 평안도 696명의 뒤를 이었다.

이 가운데 `한인 미주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미국 이민국의 기록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1903년 1월부터 1904년 6월까지 처음 1년 반을 기준으로 하와이에 도착한 2천647명의 이전 거주지는 경기도 932명(35.2%), 경상남도 376명(14.2%), 경상북도 193명(7.3%)로 영남이 한때 두번째를 차지했음을 알 수가 있다.

기초단체를 기준으로 보면 1904년 1~6월까지 대구를 포함한 경북에서는 경주가 26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대구 20명, 청도 11명, 예천 9명, 영덕 7명, 성주 6명의 순이었다. 경주는 하와이 이민 초기인 1903년 1~6월까지는 다른 경북 출신과 마찬가지로 전혀 입국 기록이 없었으나 이후 7~12월까지 9명이 첫 등장했으며 대구 6명, 상주·예천·의성·청도가 3명씩 기록됐다.

따라서 당시 하와이 이민사회에서 경북의 위상은 상당했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1928년 호놀룰루에서 결성된 영남부인회의 활동은 특히 눈길을 끈다. 고국에서 상대의 사진 한장으로 선을 본 경상도 출신 `사진신부`들이 주축이 된 이 단체는 경남 의령 출신 독립운동가 이극로의 하와이 방문 연설회가 계기가 됐다. 영남 출신 여성들의 열렬한 환영이 못마땅했던 이승만이 “경상도 놈이 박사면 아는 것이 얼마나 되며 국어는 얼마나 안다고 강연하겠다는 것인가”라며 폄하했다는 소문이 나돌게 돼 단체의 결성으로 이어졌다고 기록들은 전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임재현기자 imj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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