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천년의 비밀 경주 고분을 찾아서
⑨ 멸망한 왕조의 무덤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삼릉.

권불십년(權不十年)이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어떤 권력도 10년을 이어 영화 누리기가 힘들고, 제아무리 어여쁜 붉은 꽃이라 해도 그 온전한 색채는 열흘을 가지 못한다고 했다.

통일신라말 신덕·경명왕 통치 시절엔
기울어진 국운 속 천재지변까지 잦아

8대 아달라왕릉 옆 父子가 나란히 묻혀
신덕왕릉은 두번이나 도굴 당하기도

경주시 배동에 위치한 삼릉(사적 219호)을 찾았던 날은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대낮임에도 하늘은 캄캄했고, 때때로 벼락까지 치는 궂은 날씨. 능으로 오르는 소나무 숲길이 질척거렸다.

통상 `삼릉`으로 칭해지는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능 또한 여지없이 비에 젖고 있었다. 서남쪽 방향 지척에 위치한 55대 경애왕릉 역시 마찬가지. 아달라왕의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왕은 모두 신라가 기울어가던 시절의 통치자들이었다.

세계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장기간 지속된 신라왕조. 992년 동안의 부침과 그 속에서 벌어졌던 드라마틱한 사건들을 떠올리니 진원지를 알기 힘든 우울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렇다, 사라지거나 떠나는 모든 것들은 눈물과 한숨 속에 자리한다. 그것이 한 개인의 죽음이건, 천년왕국의 소멸이건.

흐리고 비가 오는 날임에도 경주가 한국만의 관광지가 아닌 `세계적 관광지`임을 증명하듯 일본인 단체관광객 십여 명이 삼릉을 찾아왔다. 일본인 특유의 조용함으로 가이드를 따르던 그들이 아달라왕릉 앞에 멈춰 섰다. 일본어 설명이 안내자로부터 이어졌다. 해석하면 아래와 같은 내용일 터였다.

“한국의 유명한 역사책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기록돼있지 않지만, 이곳은 신라의 8대 임금인 아달라왕의 무덤입니다. 지름이 20.4m이고, 높이가 5.2m나 되니 꽤 큰 고분이지요. 하지만, 경주 시내에 있는 거대한 왕릉들에 비하면 소박한 규모입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횡혈식석실분으로 추정됩니다. 저기 보이는 혼유석(魂遊石·영혼이 쉴 수 있도록 무덤 전면에 놓아둔 돌)은 현대에 들어서 만든 것이고요.”

아달라왕릉의 서쪽 바로 옆, 그러니까 세 개의 고분 중 가운데 자리한 것이 신덕왕릉이다. 이 역시 원형봉토분이고, 통일신라시대 고분의 양식인 횡혈식석실분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삼릉의 솔숲이지만, 겨울 설경은 특히 아름답다.
▲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삼릉의 솔숲이지만, 겨울 설경은 특히 아름답다.

신덕왕릉은 두 차례에 걸쳐 도굴범들의 침입을 받았다. 한 번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이었고, 나머지 한 번은 1963년이었다. 두 번의 도굴은 이 능이 내부에 긴 연도(羨道·고분 입구에서 시신을 안치한 방까지 이르는 길)를 두고 정방형의 평면에 할석(깬 돌)을 쌓은 석실분임을 구체적으로 알게 해주었으니, 도굴이란 범죄가 역사적 실체를 확인시킨 웃기고도 슬픈 사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덕왕 통치 시절엔 천재지변이 많았다고 한다. 봄이 한창인 4월에 서리가 내리고 지진이 일어났으며, 잦은 해일과 떼로 몰려든 까치와 까마귀 탓에 백성들이 힘들어 했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 이런 걸 감안하고 생각해보면 신덕왕은 살아있을 때는 고민이 끊이지 않았고, 죽어서도 자신의 유택을 도둑에게 내놓아야 했던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삼릉의 가장 서편에서 영원한 잠에 빠져든 경명왕의 삶은 어땠을까? 신덕왕의 아들인 그는 기울대로 기운 국운을 어렵사리 떠받치고 있던 왕이었다. 과거의 영화는 이미 사라졌고, 당시 신라는 경주 일대 작은 지역만을 다스리는 소방(小邦)으로 전락해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궁예와 견훤은 지속적으로 신라를 압박했다.

매사냥을 즐겼던 낭만주의자였으나, 망해가던 나라에서 경명왕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아버지 신덕왕 때와 유사한 흉측한 일도 곳곳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벽화 속의 개가 울부짖고, 황룡사 탑의 그림자가 한 달씩이나 거꾸로 섰으며, 메뚜기떼가 훑고 간 들녘은 폐허로 변했다. 비극의 정점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선대의 임금들처럼 화려하고 거대한 능을 조성할 여력이 없었다. 이에 대해 경주학연구원 박임관 원장은 “통일신라시대 말기는 지극히 혼란스러웠다. 왕의 재위기간도 짧았다. 권력이 불안정하고, 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상황이니 사후의 장례절차도 간소화되었으리라 추측된다. 경명왕릉을 포함한 삼릉 전부가 전대 신라왕들의 고분과 비교해 단순하고 소박한 것은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경명왕릉의 봉분 높이는 4.5m, 지름은 15.9m다. 황남대총이 폭 120m, 봉분 높이가 23m에 이르는 것과 비교하면 그 작은 규모가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게다가 `삼국유사` 등에서는 “경명왕은 황복사 북쪽에서 장사 지내 화장한 후 그 뼈를 성등잉산(省等仍山) 서쪽에 뿌렸다”고 적혀 있어 역사학계에서는 `경명왕릉에 묻힌 사람이 과연 경명왕이 맞는가`라는 논란이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 삼릉 일대는 드라마 `선덕여왕`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 삼릉 일대는 드라마 `선덕여왕`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박임관 원장은 아래와 같은 말로 `삼릉 속 매장자의 진위논쟁`을 부연했다. “문헌상으로 볼 때는 삼릉이 누구의 무덤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17세기 말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경주의 박씨와 김씨 가문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왕릉을 지정했고, 그것에 대한 정밀한 비판과 검증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냉정함과 논리를 갖춘 사학자들의 비판적 연구와 성찰이 필요하다.”

이 같은 박 원장의 지적은 합리적으로 보인다. 한 해 경주를 찾는 관광객은 수학여행을 오는 학생을 포함해 대략 1천200만 명. 엄청난 숫자다. 이들에게 신라 역사와 고분에 관한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고, 체험적 역사학습을 통해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의 비껴갈 수 없는 책무이기 때문이다.

삼릉에서 200m쯤 걷다보면 신라 55대 경애왕의 능과 만날 수 있다. 신덕왕의 아들이자 경명왕의 동생이었던 경애왕 또한 아버지와 형처럼 불행했던 삶을 살았다. 당시 한반도에서 새로운 권력자로 커가던 왕건에게 굴종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며 나라를 지키고자 했으나, 결국 후백제의 실력자 견훤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함께 있던 왕비와 후궁들은 후백제군에게 능욕까지 당했다고 전해진다.

삼릉을 돌아보고 내리는 빗속을 걸어 계곡에 이르렀다. 조그만 새 몇 마리가 흐린 하늘로 날아올랐다. 신라왕조의 마지막 시대를 살다간 불행했던 왕들의 넋이 환생한 건 아니었을까?

▲ 안개가 자욱한 삼릉 소나무숲을 지나는 승려.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1000년 전 신라의 모습이 자연스레 상상된다.
▲ 안개가 자욱한 삼릉 소나무숲을 지나는 승려.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1000년 전 신라의 모습이 자연스레 상상된다.
詩가 떠오르는 삼릉계곡 솔숲

비오거나 자욱히 안개 낀 몽환적 풍경
사진작가들에 사랑 받는 보물같은 곳

본격적인 더위와 장마가 몰려온다는 뉴스가 아침잠을 깨운 날. 경주 삼불사를 뒤로 하고 울창한 소나무숲에 이르렀다. 이른바 삼릉계곡.

훌쩍 큰 키로 우아하게 늘어선 소나무들이 푸른 바람을 만나 천 년 전 목소리 그대로 아기처럼 울고 있었다. 여름날이 선물한 고적한 풍경. 그 짙고 푸른 정물화 속에서 신라와 신라 사람들을 각별히 흠모한 미당 서정주(1915~2000)의 `붉디붉은` 시 한 편을 떠올렸다.

“속눈썹이 기이다란 계집애의 연령은/댕기 기이다란/은댕기 기이다란/瓦家千年(와가천년)의 은하 물굽이/푸르게만 푸르게만 두터워갔다/어느 바람 속에서도 부끄러운 열매처럼 부끄러운 계집애/靑蛇(청사), 뽕나무에 오디개 먹은 청사/천둥 먹음은/번갯불 먹음은/소나기 먹음은/검푸른 하늘가에 초롱불 달고/고요히 吐血(토혈)하며 소리 없이 죽어갔다는 淑(숙)은/유채 손톱이 아름다운 계집이었다 한다.”

일상에 매몰돼 하루하루를 겨우 견디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중·고교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시 한 편쯤 낭송하게 만드는 힘이 삼릉 솔숲에는 존재한다.

소리 없이 비가 오거나, 자욱한 안개가 부드러운 커튼처럼 숲을 감싸는 날이면 삼릉 일대 소나무는 잃어버린 꿈의 은유가 된다. 그 숲길을 걷는 늙은 사내들은 폐병에 걸려 하얀 손수건을 피로 적시던 `숙`이란 이름의 첫사랑을 아프게 떠올린다.

사진작가들의 촬영지로도 명성이 자자한 삼릉계곡과 소나무숲은 경주가 자긍심 속에서 아끼는 보물 중 하나다. 전세계 음악팬에게 사랑받는 영국 가수 엘튼 존(69)은 삼릉 소나무를 찍은 한국 작가의 사진을 2천만 원에 구입하기도 했다. 그가 만약 경주를 찾는다면, 신라의 고분과 불국사 등의 고찰(古刹)을 소재로 노래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나무와 풀을 허투루 보지 않는 예민한 예술가들은 말한다. “수명이 다한 소나무들은 솔방울을 많이 매달고 있다. 왜냐고? 소나무는 자신이 죽을 때를 안다. 그 시기가 되면 종족보존의 본능이 발동하는 것이다.”

삼릉 일대 소나무들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 터. 그들이 지켜본 신라 천년의 역사가 무언의 목소리로 술렁이는 삼릉계속 솔숲은 여전히 비밀스럽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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