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천년의 비밀 경주 고분을 찾아서
⑦ `울울창창` 소나무 호위받는 선덕여왕릉
이름모를 풀꽃 향취가 감싸안은 진덕여왕릉

▲ 울창한 소나무숲 가운데 자리한 선덕여왕릉.

초여름답지 않은 뜨거운 햇살이 푸른 눈동자의 외국인 관광객 하얀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주위는 고요했고 어디선가 이름 모를 산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경주시 현곡면 오류리에 자리한 진덕여왕릉(사적 24호)으로 가는 길은 평화로웠다.

미국 혹은, 유럽 어느 나라에서 왔을까? 기자를 앞질러 능에 이른 백인 여행자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진덕여왕릉 위에 피어난 보라색 풀꽃과 그 위를 소리 없이 날아다니는 나비 한 마리를 본 것이었다. 예기치 않은 선물처럼 아름다운 풍경.

재위기간 7년, 짧은 통치로 끝난 진덕여왕
김춘추·김유신 사이서 허수아비 삶 살아
십이지신상 두른 무덤 만큼은 누구보다 화려

생전 “도리천에 묻어달라” 지목한 선덕여왕
인본주의 펼친 비범한 女王… 삶은 가시밭길
산꼭대기 깎아 만든 무덤·돌출된 호석 독특


선덕여왕의 능으로 가는 길이 짙푸른 소나무가 뿜어내는 향기로 가득했다면, 진덕여왕릉은 이름 모를 풀꽃이 풍겨내는 미묘한 향취가 호위병인양 무덤 주위를 휘감고 있었다. 어디선가 환청처럼 신라인의 노랫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죽음 이후에는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 속에 누웠지만, 살아생전 진덕여왕의 삶은 그다지 행복했다고 볼 수 없다. 그녀가 왕으로 있던 때는 7세기 중반. 고구려·백제와의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기였고, 신라의 권력은 진덕여왕이 아닌 김유신과 김춘추에게 기울어 있었다.

역사학자 김기흥 씨는 그의 책 `천년의 왕국 신라`에서 성골(聖骨)이었던 진덕여왕과 그 아래 골품인 진골(眞骨) 출신 김춘추의 당시 권력관계를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김유신은 김춘추의 처남이며 두 영웅은 의기투합하고 있었으므로, 김유신의 득세는 곧 김춘추의 득세였다. 김유신보다 상대적으로 좀 더 전통적인 진골귀족에 해당하며 왕실의 일원이기도 한 김춘추는 처남의 절대적인 후원 속에서 실질적인 집권자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어찌 보면 허울뿐인 왕. 진덕여왕의 재위 기간은 7년으로 비교적 짧았고, 그 시간 동안도 `제대로 된 통치권`을 행사하기 힘들었다. 선왕이었던 선덕여왕과 비교해 `성골 출신 공주`라는 프라이드도 가지기 힘들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다수의 역사학자들은 진덕여왕을 탁월한 지략을 지닌 대신(김춘추)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용맹한 장수(김유신) 사이에서 허수아비의 삶을 살았다고 추정한다. 그녀가 지닐 수 있는 자긍심이라고는 “나는 신으로부터 성스러운 혈통을 부여받아 왕이 될 몸으로 태어났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한 생에 대한 보상심리였을까. `삼국사기`에 “경주 남산 서쪽 사량부(沙梁部)에 있다”고 전하는 진덕여왕의 능은 아름다운 풍광에 둘러싸여있고, 14.2m 달하는 봉분의 직경이 일반인의 무덤을 압도한다. 거기에 탱석에 새겨진 십이지신상의 위용 또한 천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변함없이 늠름하다. 죽음 이후의 집은 누구의 것보다 화려한 것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부처의 풍모를 닮아 팔이 무릎까지 내려오고, 풍만한 몸에 자비로운 미소를 지녔다는 진덕여왕. 어쩌면 그녀는 권력지향의 정치가보다는 풀꽃과 나비를 사랑하는 낭만적 여인으로 살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진덕여왕의 유택은 그런 상상을 나래를 펼치게 한다.

 

▲ 불행한 삶을 살았던 진덕여왕. 그녀의 능은 그 삶을 보상받으려는 듯 화려하다
▲ 불행한 삶을 살았던 진덕여왕. 그녀의 능은 그 삶을 보상받으려는 듯 화려하다

진덕여왕의 앞서 신라 27대 왕을 지낸 선덕여왕은 탤런트 이요원(선덕여왕 역), 고현정(미실 역), 엄태웅(김유신 역) 등이 출연한 드라마로 대중들에게 보다 가까워졌다.

인기리에 방영된 이 드라마로 인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선덕여왕을 포함한 신라의 역사와 인물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경주의 주요관광지엔 선덕여왕 역으로 열연한 이요원의 사진이 걸려 관광객들을 반긴다.

사적 182호인 선덕여왕릉은 경주시 보문동의 야트막한 산 정상에서 만나볼 수 있다. 경사가 심하지 않은 산길을 산책하듯 10분쯤 오르면 황룡사 9층 목탑을 축조하고, 첨성대를 세운 1400여 년 전 왕과 알현하게 된다.

능으로 오르는 길에는 청록색 계절의 기운을 받은 소나무가 저마다의 높이를 과시하며 울울창창 기세를 겨룬다. 만인의 위에 군림하면서도 인본주의를 잊지 않았던 선덕여왕. 늘어선 소나무들은 그녀의 호위무사를 자처한 신라 사내의 부활처럼 느껴진다.

산꼭대기 남쪽을 깎아 조성한 선덕여왕릉은 6.8m 높이로 우뚝하고, 봉분 둘레만도 73m가 넘는다. 능을 보호하기 쌓은 호석(護石)이 돌출돼 있는 독특한 모습이기도 하다. 또한, 입구와 봉분 주위가 잘 정비돼있어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둘러보는 명소로 자리했다.

선덕여왕의 삶과 죽음은 드라마로 만들어질 만큼 부침이 컸다. 여성의 몸으로 최고 통치권자가 된 선덕여왕은 순탄치 않은 길을 걸어야했다. 642년 백제와 벌인 대야성 전투는 그 위기의 정점이었다. 상대는 백제의 의자왕이었고, 이 싸움에서 김춘추의 사위였던 품석이 죽는다. 마음이 급해진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와줄 것을 정중하게 요청한다. 하지만, 당나라 왕의 반응은 냉담했다.

 

▲ 진덕여왕릉 위에 핀 보라색 풀꽃 주위를 날아다니는 나비. 여왕의 부활인듯 아름다웠다.
▲ 진덕여왕릉 위에 핀 보라색 풀꽃 주위를 날아다니는 나비. 여왕의 부활인듯 아름다웠다.

`여자와는 중요한 정책을 논하거나, 군사적 교류를 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심지어 “백제가 신라를 업신여기는 것은 여왕이 통치하는 국가라서 그렇다. 그러니, 내 친척 중 한 명을 신라로 보내 왕으로 삼고 당나라 군대를 파견하겠다”는 모욕까지 일삼았다. 약소국이 겪어야 할 아픔을 가녀린 몸으로 견뎌내야 했던 것이다.

지난했던 삶과 마찬가지로 선덕여왕의 죽음 역시 비극적이었다. 신뢰했던 비담(毗曇)을 신라 최고의 벼슬인 상대등에 앉혔으나, 비담은 “정치를 형편없이 한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고, 그 난리통에 선덕여왕은 목숨을 잃었다.

여러 면에서 비범했던 그녀였지만, 가시밭길의 삶과 갑작스런 죽음은 피해갈 수 없었다. 선덕여왕은 살아있을 당시에 이미 자신이 죽으면 묻힐 곳을 신하들에게 일러줬다. 신라 왕릉을 연구했던 역사학자 이근직은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자신의 책에 썼다.

“선덕여왕은 도리천을 사후 매장지로 지목했다. 신하들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리천은 하늘에 있는 산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여왕은 낭산 산정이 도리천이라 알려줬다. 이후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선덕여왕릉 아래 사천왕사(四天王寺)를 건립했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선덕여왕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천왕을 모신 사천왕사 위에 도리천이 있으므로, 낭산 꼭대기가 바로 도리천이었다는 것을”.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능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꿈인 듯 현실인 듯 소나무숲을 떠다니는 두 마리의 노란 나비를 보았다. 그 미려함이 마치 부활한 여왕들 같았다.

▲ 선덕여왕의 이야기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 선덕여왕의 이야기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삼국유사`속 선덕여왕의 지혜와 예지력

관대한 성품에 어질고 총명하기까지…
後代의 사가·당대 백성에 두루 사랑받아

서기 632년부터 647년까지 신라를 통치한 선덕여왕. 그녀는 후대의 사가(史家·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와 당대의 백성들에게 두루 사랑받았던 보기 드문 왕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공히 선덕여왕의 지혜와 영험, 풍모와 인품을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짤막하고도 강렬한 어법으로 여왕을 묘사한다. “선덕여왕은 성품이 관대하며 어질고 총명했다”. 개인에 관한 구체적인 칭송을 가능한 자제하는 역사학자들의 태도를 감안하면 이는 최상급의 찬사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보다 구체적인 기록으로 선덕여왕의 지혜와 예지를 칭송하고 있다. 책에 따르면 선덕여왕이 `덕만공주`로 불렸던 어린 시절, 당나라가 모란꽃 그림을 신라왕실에 선물했다.

공주가 가진 지혜의 깊이를 알아보고 싶었던 왕이 묻는다. “이 그림을 보면 너는 어떤 생각이 드느냐?” 덕만공주는 망설임 없이 답한다. “아름답지만 향기는 없을 것입니다.” 그림 속 모란 주위에 벌과 나비가 몰려들지 않았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이를 자연스레 향기와 연관시킨 어린 소녀의 지혜. 명민했던 선덕여왕은 일찍부터 인간세상의 본질과 핵심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듯하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의 신비스런 예지력을 보여주는 일화도 등장한다. 그녀의 집권시기는 백제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던 때. 화창한 늦봄 어느 날. 왕궁 근처 사찰의 연못에 수천 마리의 개구리가 몰려와 시끄럽게 울어댔다. 그 소식을 들은 선덕여왕은 측근 장수에게 명을 내린다. “지금 당장 병사들을 이끌고 여근곡(女根谷)으로 가보라.”

갑작스런 출병 지시에 의구심이 일었지만 왕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이 그 곳으로 간 장군과 병사들은 깜짝 놀란다. 거기엔 백제 병사 수백 명이 몸을 숨긴 채 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선덕여왕의 예지가 백제의 기습적인 침탈을 미리 막아낸 것이다. 궁으로 돌아온 알천(閼川) 장군이 묻는다. “왕이시여, 어떻게 개구리 울음소리만을 듣고 적군이 매복했다는 걸 아셨습니까?”

웃음 띤 얼굴로 선덕여왕이 말했다. “개구리는 성난 모습의 병사 형상이고, 여근곡은 여성의 기운이 서린 곳이니 음(陰)이 아니냐. 음은 흰색이고, 흰색은 서쪽 방향을 의미하기에 백제 병사가 거기 숨었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옛이야기에는 다소간의 과장이 섞이기 마련이다. 선덕여왕과 관련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에도 과장이 없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해 보인다. 역사책과 옛이야기 속 선덕여왕은 그 아름다움과 지혜가 현대의 `스타 여배우`를 뛰어넘고 있다는 것.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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