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천년의 비밀 경주 고분을 찾아서
④ 동해에 잠든 왕은 말이 없지만…

▲ 매년 문무왕릉이 자리한 인근 해변에서 열리는 해맞이 행사.

얼굴을 간질이는 봄 햇살 쏟아지는 바닷가. 우려하던 적의 침입이 외형상으론 사라져서일까? 죽은 왕은 일렁이는 파도 속에서 침묵했다. 반면, 산 자들은 왕의 뼈가 묻혔다고 전해지는 바위를 바라보며 왁자지껄 저마다의 소원을 빌고 있었다. 고요한 바다와 시끌벅적한 해변. 대비되는 풍경이었다.


경주 봉길리 해변서 200m 떨어진 수중릉
왕릉 조성 대신 불교화장 유언은 선진적 결단
죽어서도 나라 지키려는 호국대룡 기개 서려


문무왕릉(사적 158호)을 찾아가던 날. 바다의 빛깔은 유난히 푸르렀다. 불 태워진 왕의 뼈가 안장된 곳으로 알려졌기에 `대왕암`이라고도 불리는 바위는 모래톱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외로이 자리하고 있었다.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수중릉(水中陵). 신라 고분 연구자였던 이근직은 저서 `신라왕릉연구`에서 문무왕릉에 관해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능은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해변에서 약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은 681년 7월 1일에 죽으면서, 불교의 법식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묻으면 용이 돼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신문왕이 10일 뒤 천자 오문 가운데 하나인 고문의 바깥뜰에서 화장한 뒤, 그 다음해 5월에 유해를 동해 입구에 있는 큰 바위에 장사지냈으므로 그 후 이 바위를 대왕암이라 부른다.”

역사책 속에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군주`로 기록된 문무왕. 태종무열왕과 문명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황산벌 전투의 지장(智將)으로 유명한 김유신의 외조카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명민한 머리로 두각을 드러낸 문무왕은 왕좌에 오르기 전부터 부친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고, 각종 국가적 업무를 주도해 처리했다.

권좌에 올라서는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켜 이른바 `삼국시대`를 `통일신라시대`로 전환시킨 왕으로 평가받는 문무왕. 이처럼 뚜렷한 역사적 족적을 남겼지만, 개인적인 측면에서도 그는 `행복한 지배자`였을까?

이런 의문을 담아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한정호 교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왕이 거대한 봉분을 만들어 장례 지내라 하지 않고, 화장을 해 바다에 뼈를 묻으라는 유언을 했다는 게 생각 밖이다. 왜 그랬던 것일까?” 돌아온 답은 아래와 같았다.

 

▲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에 위치한 문무왕릉.
▲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에 위치한 문무왕릉.

“문무왕이 화장을 선택한 이유는 불교적 신념과 관계가 깊다. 삼국통일의 영주로 추앙됐지만 한 인간으로서 문무왕의 삶은 불행했다. 오랜 세월 이어진 전쟁으로 누이와 매형을 잃었고 평생을 전장에서 비인간적이고 비참한 현실을 자의와 상관없이 지켜봐야 했다. 장법(葬法)과 장지(葬地)의 선택은 그의 호국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추측된다.”

여러 문헌의 기록과 역사학계의 연구에 의하면 문무왕 이전 시대 신라에서 화장은 보편적인 장례법이 아니었다. 불교도인 승려들도 화장이 아닌 매장을 선택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화장한 내 뼈를 바다에 묻겠다”는 문무왕의 유언은 1천300년 이상의 시간을 뛰어넘는 선진적인 결단으로도 읽힌다.

“문무왕의 화장 이후 신라에서는 화장문화가 급속히 확산됐고, 34대 효성왕과 37대 선덕왕도 화장을 해 동해에 그 뼈를 뿌렸다”는 게 이와 관련한 한 교수의 부연이다.

살아생전 문무왕은 가까이는 백제와 고구려, 멀리는 당나라의 강력한 군사력에 맞서야했다. 그런 이유로 신라를 지켜내려는 그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를 두고 `힘과 지혜로도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어렵다고 생각될 때면 뇌물을 쓰고, 편법을 동원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던 군주`로 문무왕을 평가한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유지하려는 `호국`의 마음가짐은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한 교수에게 하나를 더 물었다.

“문무왕은 죽은 후라도 용이 돼 나라와 백성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신라시대에 동해를 통해 침입하는 외적들이 있었는가?” 이에 대한 상세한 대답이 돌아왔다.

“동해구의 문무왕릉은 신라의 도읍 경주에서 동해에 이르는 최단거리에 위치했다. 임진왜란 때도 전투가 빈번했던 장소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를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은 멸망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유민과 결합한 왜(倭·일본 사람)였다. 실제로도 이들이 `백제부흥`을 외치며 금강 하구로 침략했던 기록이 있다. 문무왕은 이를 염두에 둔 듯하다. 대왕암 부근에 만들어진 감은사도 침입하는 왜병을 진압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역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문무왕릉은 많은 수의 신라 왕릉들처럼 “세간에 알려진 피장자(무덤에 묻힌 사람)와 실제 피장자가 다르다”는 논쟁 속에 있다. `삼국유사`에도 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 가운데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고 간단히 언급될 뿐이라 이 논란은 여전히 고고학계의 `뜨거운 감자` 중 하나다. 하지만, 이에 관한 한정호 교수의 견해는 칼로 자른 듯 명료하다.

“문무왕릉에 묻힌 사람은 문무왕이다. 울산에 위치한 또 다른 대왕암을 문무왕릉이라 주장하는 일부 향토사학자들이 있지만, 이를 증명할 근거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다만, 문무왕릉이 화장한 유해를 뿌린 산골처(散骨處)인지 그게 아니면 뼈를 묻은 장골처(藏骨處)인지에 대한 논란은 있을 수 있다.”

`진짜 피장자는 누구인가`를 둘러싼 현대 역사학자들의 갑론을박 속에서도 문무왕은 중앙부에 물을 가두고 동서로 긴 수로를 만든 `영원한 잠의 안식처`에서 한마디 말이 없다.

그저 바다만큼 푸른 4월의 하늘 아래서 재위 때처럼 백성(국민)들을 자애롭고 그윽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을 뿐. 왕의 무덤을 호위하듯 줄지어 늘어선 12개의 바위는 세월과 파도에 깎여가고.

문무왕릉에 관해 잘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대왕암을 `댕바위`라고 불렀다. 이곳은 지금도 토속신앙과 용왕신앙을 받드는 이들이 모여드는 영험한 기도처로 각광받고 있다. 이들은 문무왕이 동해의 용왕으로 몸을 바꾸었다고 믿고 있다.

혼곤한 햇살 아래 앉아 옛이야기의 매력에 빠져들다 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왕은 외부의 침입보다 더 무서운 인간 내부의 온갖 욕망들을 해소해달라며 밀려드는 부탁에 바다빛깔처럼 푸른 몸살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 신라 문무왕과 신문왕의 호국의지가 축조한 감은사. 학생들이 그 절터를 둘러보고 있다.
▲ 신라 문무왕과 신문왕의 호국의지가 축조한 감은사. 학생들이 그 절터를 둘러보고 있다.
선왕의 뜻 받들어 신문왕이 축조한 `감은사`

용이 된 王, 바다 오가며 쉬던 곳
나란히 마주 선 석탑만이 남아…

병들어 누운 왕의 곁에 몰려든 고관대작과 승려들이 걱정스레 물었다. “왕이시여, 진정 귀하신 몸이 짐승인 용으로 다시 태어나도 괜찮겠습니까?” 희미하게 웃음 띤 왕이 사람들의 우려를 떨치며 답했다. “일생 부귀와 영화를 원하며 살지 않았다. 짐승이면 어떠하냐? 내 나라, 내 백성을 위한 것인데.”

20년간 권좌에 머무르며 실질적인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신라의 문무왕은 죽음을 앞두고 신하들과 위와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전해진다. 사후에도 자신의 통치 아래 있던 신라 사람들을 보호하겠다는 왕의 호국의지를 알려주는 역사 속 에피소드다. 큰아들인 신문왕 역시 이 장면을 목격했다. 그날 이후, 신문왕에게 감은사(感恩寺·선왕의 큰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지은 절)를 완성하는 것은 지상목표가 됐다.

문무왕 말기에 축조를 시작한 감은사는 신문왕이 즉위한 이듬해(682년) 마침내 창건을 맞았다. 문무왕의 수중릉이 지척인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위치한 감은사. 지금은 터와 삼층석탑 2기 등의 유물이 남아 사적 제31호로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해마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을 포함 많은 수의 관광객들이 찾는 경주의 보물 중 하나가 됐다. 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발굴 조사에서는 감은사의 주춧돌이 놓였던 것으로 보이는 지하에 그 사용처를 추측하기 어려운 공간이 발견됐다. 몇몇 호사가들은 이곳을 두고 “용이 된 문무왕이 바다를 오가며 쉬던 곳”이라며 놀라워했다. 아버지를 위한 신문왕의 효심이 만든 침실이라는 것. 실제로 이런 지하공간은 여타의 절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게 고고학계의 이어지는 설명이다.

사천왕사(四天王寺), 황룡사(皇龍寺)와 더불어 신라의 호국의지를 드러내는 사찰로 이름 높았던 감은사가 언제 터만을 남기고 역사 속에서 사라졌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조선시대 초기와 중기 사이에 폐사(廢寺)되었을 가능성만이 이야기되고 있을 뿐. 하지만, 감은사지에 남겨져 현대인들에게 그 자태를 드러낸 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문무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리와 사리함,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 각종 기와와 토기 등은 통일신라시대의 화려했던 문화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유산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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