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대가야의 숨소리를 듣다
① 상전벽해의 풍경… 과거를 넘어 내일로

▲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고령군.

번성했던 고대왕국 대가야. 경상북도 고령군은 빛나는 문화유산으로 한국사에 기록된 대가야의 후손들이 삶을 이어가는 고장이다. 본지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지난날의 영광을 되살려 보다 나은 내일을 열어가고자 하는 고령의 과거와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기사를 6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가야체험축제 등 관광·문화산업 정착
`2017년 올해의 관광도시` 선정 쾌거로
산업단지 확대 등 신성장동력 창출 총력
성공한 도농복합지역 `한발 앞으로`

올해 여든넷의 이도원 옹과 여든여섯 황진호 옹이 기억하는 고령의 과거는 지금으로선 상상이 잘 되지 않을 정도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처럼 들렸다. 고령군 개진면 신안리에 거주하는 두 어르신은 입을 모아 “우리 고장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풍경으로 바뀌었다”며 “내가 어렸던 시절과 비교하면 몰라보게 편하고 살기 좋아졌다”고 말했다.

▲ 고령군 대가야읍 쾌빈리에 위치한 우륵박물관 전경.
▲ 고령군 대가야읍 쾌빈리에 위치한 우륵박물관 전경.
이 옹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중학교를 다녔다. 그가 기억하는 대가야읍은 초가집 천지였다. 갈대나 볏짚을 이어 지붕을 올린 초가집은 화재의 위험성을 상시적으로 안고 있었고, 위생과 생활의 편의성면에서 현대의 주택과 비교할 바가 못 됐다.

다들 하루 세끼를 챙겨먹기도 힘들었던 시대.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수단이 없었으니, 이 옹은 고령중학교까지 또래 친구들과 걸어서 등하교를 했다. 비가 오면 진흙투성이가 되고, 자갈까지 튀는 비포장도로에 가끔씩 나타나던 목탄차. 이 차 짐칸에 운전수 몰래 올라타 본 건 `신기한 경험`이었다.

당시 대구를 오가려면 금산재를 넘어야했다. 지금은 벚꽃 흐드러진 아름다운 고갯길로 변한 금산재. 하지만 예전엔 꼬불꼬불한 산길이라 교통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했고 그로 인한 인명피해도 적지 않았다. 모두가 산을 관통하는 터널이 뚫리기 전 이야기로 이젠 30분안팎의 시간이면 고령에서 대구로 갈 수 있다.

이 옹은 이앙기가 보급되던 시절의 기억도 떠올렸다. “처음에는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어색해하며 이앙기 사용을 주저했는데, 이제 모두가 기계에 올라타서 모를 심고 있으니 세상이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며 이 옹과 황 옹이 웃었다.

▲ 고령의 과거를 재밌는 옛이야기처럼 들려준 황진호 옹(좌)과 이도원 옹.
▲ 고령의 과거를 재밌는 옛이야기처럼 들려준 황진호 옹(좌)과 이도원 옹.
유년시절부터 변해가는 고령의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보며 나이 들어온 두 어르신의 고향사랑은 남달랐다. 이들은 “대가야 체험축제 등으로 고령이 전국적인 관광도시로 발전하고 있는 모습에 자부심을 느낀다”며, “역사와 문화의 향기 가득한 우리 고장을 많은 사람들이 찾아줬으면 좋겠다”는 당부의 말을 남기기도 했다.

□ 현재, 1읍 7면으로 나뉜 인구 3만6천여명의 도시

여든을 넘긴 노인세대가 기억하는 고령의 과거가 위와 같았다면, 오늘날의 고령은 어떤 모습일까. 행정구역상 1읍 7면으로 나뉜 고령군의 전체 예산규모는 2천763억원, 인구는 3만6천여 명이다.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남북을 가로지르고, 동서는 광주~대구고속도로가 이어준다. 50km 거리엔 대구국제공항도 위치해있다.

곽용환 군수는 고령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배후에는 “21세기 들어 대가야 역사문화 관광자원을 개발하고, 낙동강과 가야산의 청정 환경이라는 자연적 입지를 활용해 근교농업을 발달시키려 한 군민들의 노력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가난한 농촌마을에서 도농복합지역으로 탈바꿈한 고령군. 초가집 사이로 매연 뿜어내는 목탄차가 다니고, 좁은 비포장도로 인해 불편을 겪던 과거의 모습은 이제 역사책 속에서나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발전의 노력은 최근까지도 이어져 `대가야 문화누리 개관`과 `대가야교 건립`, `서울시와의 우호교류협약 체결`과 `도시가스 공급 시대 개막`이라는 크고 작은 성과를 이뤄냈다.

고령은 한때 찬란한 문화와 함께 번성했던 대가야의 도읍이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고서에 따르면 대가야는 이진아시왕부터 도설지왕까지 520년간 이어진 왕국으로 추정된다. 5세기 이후 고령과 합천 등 내륙 산간지역은 농업기술과 제철기술을 빠르게 발달시켜 문화중심지로 주목받았다. 대가야가 이처럼 번성했던 시절에는 백제, 신라와 힘을 규합해 고구려를 침입하기도 했고, 554년에는 백제와 연합군을 결성해 신라를 공격하기도 했으나 이 싸움에 패해 국력이 급속히 쇠약해져갔다.

정치제도 면에서는 인접국인 신라와 백제에 미치지 못했으나, 가야금을 제작하고, 수준 높은 음악을 만들어낸 대가야의 문화적 성취는 역사학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또한, 대가야 시대 지배계급의 거대한 무덤이 조성돼 장관을 이루는 지산동 고분군(사적 제79호)은 고령이 내세워 자랑할 수 있는 문화유적이다.

▲ 대가야 체험축제 프로그램의 하나로 펼쳐진 `대가야 진군 퍼레이드`.
▲ 대가야 체험축제 프로그램의 하나로 펼쳐진 `대가야 진군 퍼레이드`.
□ 문화융성과 함께 경제발전으로 다가올 미래 준비

이와같은 대가야의 문화전통을 이어받은 고령군은 이를 관광산업에 접목시키려는 노력을 지속해왔다. 군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대가야 체험축제`는 ◆거리 퍼레이드 ◆금관 제작체험 ◆대가야 목공체험 ◆대가야 순장체험 ◆녹색테마 생태관체험 등의 프로그램으로 많은 수의 관광객을 고령으로 불러들였다.

축제 기간 동안 연계행사로 준비한 `악성 우륵 추모제`와 `대가야 왕릉제`, 실경뮤지컬 `가야금` 공연, 인형극 `가야금을 사랑한 달깨비` 등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지역의 문화유산을 관광과 효과적으로 연계시킨 고령군의 노력은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어냈다. `대한민국 문화관광 우수축제 선정`과 `2017 올해의 관광도시 선정`은 그 사례라 할 수 있다.

고령군청의 설명에 따르면 올해도 문화와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한 노력은 계속된다. “고령이 지닌 문화자산으로 대가야 문화융성의 꿈을 실현하겠다”는 군의 다짐은 대가야역사문화발전위원회 운영과 군립 가야금연주단의 연주회 개최, 뮤지컬 등 문화공연의 확대와 대가야체험축제 자립기반 마련 등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대가야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한 노력도 고령군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다. 이를 위해 2018년을 목표로 지산동 대가야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대가야 종묘 건립사업과 대가야 시조의 어머니 정견모주와 이진아시왕 표준영정 제작사업을 펼치고 있다.

올 한해는 외국과의 문화교류도 활발히 진행할 예정이다. “이탈리아 크레모나에서 열리는 국제 현악기 페스티벌에 참가하고, 다큐멘터리도 제작할 예정”이라는 게 고령군청 관계자의 설명. 여기에 고령군 청소년들이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를 방문해 문화적 감수성을 나누는 기회도 제공할 계획이다.

문화융성과 함께 지역경제 활성화도 고령의 주요한 목표 중 하나다. 향후 100년을 준비한다는 각오로 경제기반을 구축하고 있는 고령군은 군민 4만 명, 군민소득 4만 달러 달성을 위한 `4040 프로젝트`를 세우고 신성장 동력을 창출하는데 지혜를 모으고 있다. 이와 관련 현재 가동 중인 동고령 일반산단, 열뫼 일반산단 등 기존의 5개 산업단지를 10개까지 늘려간다는 방침이다.

`문화융성`과 `경제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분주하게 뛰는 고령군.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고령이 이뤄낼 미래의 성과에 주목하고 있다.

▲ 우륵의 영정.
▲ 우륵의 영정.
`대가야의 예술가` 우륵
가야금 만든 한국의 3대 악성

궁중음악 개혁에 큰 역할을 맡았던 조선의 박연, 빼어난 거문고 연주자였던 고구려의 왕산악과 더불어 한국예술사 3대 악성(樂聖)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우륵(于勒)은 고령군이 자랑스레 이야기하는 역사 인물이다.

출생과 사망연도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서기 551년 제자들과 함께 신라 진흥왕 앞에서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으로 유추해볼 때 6세기 초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악기인 쟁(箏)에서 영감을 받은 우륵은 가야금을 만들고, 12곡을 작곡해 대가야가 `문화강국`으로 이름을 알리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예술가로서의 행복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가야금을 다루는 우륵의 기예가 정점에 달했던 시기는 대가야의 국운이 위태롭게 기울던 무렵이었고, 이에 절망한 우륵은 아끼는 제자 몇몇과 함께 신라로 망명한다. 정치적 망명이 아닌, `문화적 망명`에 가까웠다.

우륵의 감각과 높은 예술적 성취를 아꼈던 진흥왕은 신라 악사들이 가야금과 노래를 배울 수 있도록 도우라고 우륵에게 명한다. 지척에서 사라져가는 자신의 고국을 바라보며 타국 사람들에게 음악을 전수했던 우륵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를 상상해보면 그 쓸쓸함과 안타까움이 어렵지 않게 전해져온다.

우륵을 시기한 일부 신라 악사들은 “대가야의 음악은 음란하고 속되어 나라를 망쳤으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했지만, 진흥왕은 이런 목소리를 잠재우고 “사람의 심성을 곱게 하고, 세간의 바른 법도를 따르게 하는 것이 우륵의 연주”라며, 대가야의 음악을 신라의 궁중음악으로 흔쾌히 받아들였다. 진흥왕의 호방한 성품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우륵이 태어난 곳은 `삼국사기`에 아주 짧게 언급된다. 이 때문에 출생지를 놓고 여러 지방자치단체가 “우륵은 우리 지역 사람”이라며 설전을 벌여왔다.

이와 관련 조선의 지리학자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고령읍 북쪽 금곡(琴曲)은 우륵이 여러 악공과 더불어 가야금을 연습한 곳`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간 고령군은 대가야읍에 우륵박물관(2006년 3월)을 건립하고 2014년에는 `악성 우륵의 꿈`이라는 체험축제를 열어 30여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는 것으로 “우륵의 고향은 고령”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왔다. 또한, 군이 주최하거나 주관하는 `전국 우륵 가야금경연대회`와 `우륵, 금(琴)의 향연` 연주회도 해마다 개최하고 있다. /전병휴·홍성식기자

    전병휴·홍성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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