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살았던 우리의 노래 문경아리랑
④ 문경문화원, 그리고 아리랑의 미래

▲ 축제 현장에서 울려 퍼진 문경아리랑 가락.
▲ 축제 현장에서 울려 퍼진 문경아리랑 가락.

문경아리랑 전승자인 송영철, 송옥자 두 분만큼 한 많고 두 분만큼 민요를 꾸준히 사랑한 사람들이 없었을까? 경상북도를 통틀어 이런 분들이 왜 없겠는가. 단지 이 분들이 서로 모른 채로 장터와 터미널에서 스쳐지나갔을 뿐이다. 그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낸 힘은 따로 있었다.

문경아리랑보존회까지 매개역할 한
문경문화원 이창교 前 원장
항토민요경연대회·농악경연대회 등
전국 최초로 행사 만들어 보급 공로

전통-현대음악 공존하는 다양한 시도로
재해석된 아리랑, 문화콘텐츠 역할 기대

`향토민요경창대회`라는 이름의 무대는 한 사람의 희생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바로 이창교 전 문경문화원장이다. 이 원장은 1985년도부터 2003년까지 18년간 문경문화원을 매우 주도적이고 도전적으로 이끈 사람이다.

처음 이창교 원장이 취임할 당시는 문화원이 매우 침체된 상태였다. `문경향토가사집`도 이 원장이 사비 4천만원을 들여 만들어낸 것이라 하니, 보통 애정으로는 불가능할 일이다.

현 문경문화원의 사무국장인 이욱 씨는 “1980년대에는 지역마다 문화원이 있긴 했지만 직원들 월급을 주지 못하는 문화원도 허다했다”며 당시의 열악한 상황을 설명했다.

이 원장이 취임하고 한 달. 막상 문화 사업을 하려고 하니 재정형편이 어려워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문화원 운영에 관련한 비용 일체를 원장이 감당하기로 마음먹은 후에야 본격적인 문화 사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 문경아리랑 보존과 발전을 위해 진행된 `아리랑 일만수 사업` 행사에서의 고윤환 시장.
▲ 문경아리랑 보존과 발전을 위해 진행된 `아리랑 일만수 사업` 행사에서의 고윤환 시장.

“10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다가 사업을 시작했는데 운이 좋아 부를 쌓게 되었다. 사비를 출원해서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의 문화인프라를 형성하는 데까지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 원장의 회고담이다.

이창교 문화원장과 김광수 사무국장이 문경문화원을 꾸리고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향토사 자료를 수집하고 필요한 문헌을 모으는 일이었다. 문화 사업을 제대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학술적 기반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문경문화원 소속으로 서울 규장각에 파견된 연구원 둘은 4개월 여 동안 규장각 근처 여관에 기거하면서 문경에 관한 옛 문서들을 샅샅이 뒤졌다고 한다. 그렇게 모아온 귀한 자료들은 이후 향토사 자료 발굴의 근원이 되었다.

그리하여 `종합향토지`발간 작업에 착수한지 1년 만에 향토자료 종합지 `문경대관`을 3천 부 발간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매년 한 권씩 향토사 연구지를 발간하게 되었다.

향토사연구지 발간의 사회적 의미는 크다. 단순 기록의 차원을 넘어, 지역의 고유성을 기반으로 한 의미 있는 문화사업의 방향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당장에는 물가에 놓은 넓적돌 하나지만, 그 하나를 밟고 올라 다음 돌을 놓고 또 그 다음 돌을 놓으면 결국엔 징검돌이 된다. 문경문화원은 향토사 연구지 발간을 시작으로 각종 문화 사업을 다채롭게 전개해 나갔다. 문학, 음악, 연극, 미술, 서예 등 여러 분야의 대회와 교육을 실시하고 문화 강좌를 개설하고 합창단을 만들었다.

 

▲ 아리랑을 노래한 1970~80년대 음반들.
▲ 아리랑을 노래한 1970~80년대 음반들.

문경문화원이 이렇듯 시민들로 하여금 자발적 문화 활동을 이끌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시민들은 참여활동을 통해 지역 문화에 작게나마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은 관심의 씨앗이 자라나 시민들 스스로 지역문화의 부족한 부분을 찾아 채울 수 있도록 만든다. 문경문화원이 시민들의 문화적 에너지를 발산하게 하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전통은 강요하는 것이 아닌 향유하는 것

김광수 사무국장의 회고에 따르면 문경문화원에서 주최한 향토민요경창대회, 농악경연대회는 전국 최초다. 전국 최초의 사업을 이끌어간 성과는 상당했다. 문화원의 주도로 생겨난 행사들은 하나씩 다른 운영체로 옮아갔다. 특히 `향토민요경창대회`는 `경북향토민요경창대회`로 이어졌고, `시민합창단`은 `시립합창단`이 되었다. 어떤 문화 사업을 시도하든 잘 가꿔 다른 지자체에서 욕심을 내도록 만들었다면 성공적이다. 문경문화원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능력에 탁월했다. 그리고 문경시는 문경문화원이 개척해놓은 시장을 보기 좋게 키워나간다. 상호간 능력 교류를 통해 상생하는 관계인 것이다.

요컨대, 문경문화원이 우리에게 보여준 문화계승의 사회적 기반이란 이런 것이다. 첫째, 향토문화의 가치를 뒷받침해줄 학술적 기반 마련. 둘째, 향토 문화의 발굴과 보존. 셋째, 시민들의 참여 유도로 요약된다.

송영철, 송옥자 전승자에서 사단법인 문경아리랑보존회로 이어지기까지의 이 흐름은 문경문화원이라는 매개체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 문경새재 옛길 초입에 세워진 아리랑비.
▲ 문경새재 옛길 초입에 세워진 아리랑비.

그런데 `사회적 기반`에 의지한 전통 문화의 계승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전통의 원형을 보존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지만, 대중에게 어필하는지를 묻는 다면 긍정적인 대답을 얻긴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문화의 자생은 어렵다. 사람들은 전통을 강요당하기보다 향유하고 싶어 한다.

한복은 가장 한국적인 의복이다. 전통문화 중에서도 특별히 사랑받고 있다. 물론 한복을 생활화 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결혼식을 비롯한 특별한 날에는 굳이 한복을 찾는다. 명절 특집 방송마다 유명 연예인들이 한복을 입고 무대에 오르고,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디자인은 또 어떤가. 점잖고 정통적인 것들뿐인가? 아니다. 소매가 좁은 것, 동정을 없앤 것, 저고리가 긴 것, 치마가 짧은 것, 고름이 가는 것 등등 다채롭다.

전주 한옥마을엔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복 대여점이 즐비하다. 특별한 추억을 만들고 싶은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한복을 차려 입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한복의 특징적인 디자인을 차용해 만든 독특하고 전통적이며 동시에 세련된 현대 의복도 많다. 누구 하나 한복을 입으라고 강요하는 이 없지만 어떤 형태로든 한복을 향유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대부분 공감한다.

이처럼 어떤 전통은 세상을 향한 통로를 다양하게 만들어 놓음으로써 전통으로의 접근을 유도한다. 한마디로 광범위한 취향 저격이다. 대중들은 강제로 하는 건 싫어하고, 자발적으로 하는 것은 좋아한다. 한복도 그랬고 아리랑도 그랬다. 아리랑에서 신민요로 넘어갈 때도, 신민요에서 트로트로 넘어갈 때도 그랬다.

대중들이 부르길 원하고 듣고 싶어 하는 노래는 늘 있어왔다. 아리랑 이후의 노래들을 살펴보자. 대표적으로 `연락선이 떠난다`, `목포의 눈물`, `황성 옛터`, `오동동 타령` 등 트로트의 기라성 같은 노래들이 그렇다. 특히 항구를 노래하는 게 많다. 항구에서 가족이나 연인을 떠나보낸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의 탄광이나 광산의 인부로 끌려가기도 했다. 부산항 부두는 울며불며 헤어지는 사람들의 오열이 그치지 않는 이별의 항구였다고도 한다. 이렇듯 사람들이 부르고 듣고 싶어 하는 노래는 가사의 내용이 구체적인데다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 문경 옛길박물관에 전시된 아리랑 관련 음반들.
▲ 문경 옛길박물관에 전시된 아리랑 관련 음반들.

□현대 예술가들에게 영감 주는 `문경아리랑` 돼야

이제, 이러한 원리로 지금의 문경 아리랑을 점검해 볼 때다. 이러한 원리란 다름 아닌, 자발적으로 향유할 만큼의 요소가 `문경아리랑`에 있는가이다. 꼭 문경아리랑이 아니라도 `아리랑`이 현대적으로 불려질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그것은 오리지널을 어떻게 변형하는가에 달려있다.

작사가 김석태 씨는 “`문경새재아리랑`은 트로트지만 신민요 풍으로 만든 노래”라고 자신이 작사한 트로트 곡 `문경새재아리랑`을 소개했다. 토속민요 문경아리랑에 장르적 변화를 준 이유에 대해서는 “요즘 대중들에게 좀 더 쉽고 익숙하게 다가가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가사의 내용도 문경 아리랑의 대표 사설과는 많이 다르다. 시대적으로 공감을 불러 일으키기 힘들다는 게 그 이유다.

그밖에도 전통의 변형을 시도한 경우는 많다. `팝핀 현준과 박애리 부부`는 비보이와 국악인의 만남이다. 브레히트의 원작을 판소리로 재창조한 소리꾼 `이자람`도 있다. `니나노난다`는 기계와 인간, 디지털과 아날로그, 동서양의 이질적인 질감을 버무린 `퓨처 판소리`라는 장르를 개척한 부부 밴드다.

문경아리랑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했다는 니나노난다는 “전자음악이 고수의 추임새 역할을 하는 식”이라고 `퓨처 판소리`란 장르를 이해하기 쉽게 소개했다. 해외공연의 반응을 묻자 “언어의 장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감하는 걸 보면 놀라울 정도다. 전통적인데 현대음악적인 요소가 접목되어 외국인들에게 익숙함과 낯설음을 함께 주기 때문에 색다르게 느끼는 것 같다”며 국내 반응과 비교했다. “국내에서는 한국의 전통을 좋고 특별한 것으로 인식하기보다는 낡은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며 오히려 서양음악을 더 익숙하고 세련된 것으로 여기는 상황을 설명했다.

 

▲ 이창교 전 문경문화원장
▲ 이창교 전 문경문화원장

우리는 전통을 모른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통은 계승될 수 없는 환경에 처했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우리가 새로이 받아들인 것은 전통과는 거리가 먼 이국의 문화였다. 전통에 대해 방기하는 분위기가 46년 동안 지속되었다.

우리의 생활반경에서 전통문화를 대신해 채워진 이국의 문화는 의식주 전반에 변화를 가져왔다. 지금도 전통적인 것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아리랑이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음에도 아리랑은 대중적 인기를 끌거나 향유하고 싶은 문화로 받아들여지기 힘든 실정이다. 월드컵 응원가로 불렸던 윤도현의 `아리랑`이 그 경우의 마지막이었다.

문경아리랑이 문화콘텐츠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많은 현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요소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요소들을 개발하고 제공함으로써 아리랑의 재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아리랑의 자발적 향유를 꿈꿔볼 때가 아닌가 한다.

강남진 기자/이소연 시인

    이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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