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살았던 우리의 노래 문경아리랑
⑶ 문경아리랑의 전승자들

▲ 문경아리랑이 발원한 문경새재 제1관문
▲ 문경아리랑이 발원한 문경새재 제1관문

송옥자 씨가 송영철 옹의 노래를 접한 것은 1997년도 여름의 일이었다. 문경문화원이 주최한 민요경창대회였다. 한 노인의 투박한 노래를 듣다가, 몇 년 전 시에서 제작해 마을회관마다 배포한 테이프에서 들은 소리를 기억해냈다.

“4년 동안 마을 부녀회장을 맡고 있었어요. 그때 시에서 홍보용으로 제작된 테이프를 나눠주었는데 거기에 송영철 옹이 부르신 문경아리랑이 있었어요.” 그때까진 송 씨도 그저 민요를 좋아하던 마을 주민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송 씨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민요를 듣는 남다른 귀가 있었다. 그런 끼를 타고난 경우였다. 송 씨는 어릴 적부터 민요를 배우고자 했지만 번번이 장애를 만나온 인생이었다. 이 좌절은 송 씨를 우울증까지 몰고 갔다. 병원에서는 송 씨에게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처방을 했다. 단연 민요였다. 그런데 송 씨가 해야 할 `좋아하는 일`은 취미 수준 이상이어야 했다.

민요를 좋아해서 즐겨 듣고 부르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활동에 몸담기 시작했다. 주로 소리를 배우고자하는 노력이었다. 소리를 배울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 처음엔 상주까지 시조를 배우러 다녔다. 그러다 부천역 근방에 있던 국악원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송옥자씨는 소리를 배우고자 했던 자신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직면해야했던 현실에 대해서 토로했다.

“국악원을 등록해 놓고서도 수업에 참여하기 힘든 상황이었어요. 여자들 삶이 그렇잖아요. 게다가 제가 맏며느리여서 집안 제사도 많고 김장도 해야 하고...” 그런 와중에 그녀는 경기 국악대회에 참가해 예선을 통과했고 그것을 계기로 자신감을 갖게 된다.

전수자 송옥자 씨, 스승과 운명의 만남
어릴때부터 꿈꿔온 `소리의 길` 늦깎이로 시작
1997년 송영철 옹의 소리 들으며 代 이을 결심
시할머니의 문경 토속아라리 가락 영향도 받아

실제로 그녀는 1995년부터 지역의 민요경창대회에 참가했고 상도 받았다. 그러다가 특별히 문경아리랑의 전승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계기가 1997년이었다. 3년간 송 씨는 문경아리랑을 경창대회에서 불렀고, 우수상을 받기까지 했다. 송 씨는 시할머니의 소리를 생활 속에서 늘 접하며 살아왔다.

“시할머니가 소리를 참 잘했어요. 다듬이질을 하며, 물레를 돌리며 소리를 했는데 그게 다름 아닌 아리랑 후렴구가 없는 문경의 토속아라리였어요. 그런데 그땐 정말 그 소리가 청승맞게 느껴져서 듣기 싫었던 기억이 나요. 생활 속에서 근근이 불려지던 아라리를 이해하게 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 거죠. 그런데 이만큼 살고 나니, 이젠 그 청승맞던 소리가 이해가 돼요.”

 

▲ 아리랑 일만수 이운식 행사장 모습.
▲ 아리랑 일만수 이운식 행사장 모습.

그러다 1997년 향토민요경창대회에서 문경아리랑으로 우수상을 받은 바로 그 해, 다른 대회서 자신의 아리랑을 다른 차원으로 끌어줄 스승을 만났다. 그가 바로 송영철 옹이었다.

송 옹의 목을 통해 나오는 문경아리랑은 삶의 질곡들을 고스란히 전해줄 듯 꺾은 음의 연속이었다. 반주 없이 부르는 아리랑은 노동을 하고 있는 듯 힘겹도록 음절마다 굽이쳤다. 고된 몸의 소리를 토로하기에 가장 알맞은 호흡이라 느껴졌다. 뱉는 숨이랄지 몰아쉬는 숨소리까지도 진솔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실제의 삶 자체에서는 박자를 맞추듯 맞춰지는 게 없었다. 아리랑의 진수가 송 옹의 소리에 있음을 깨달은 송 씨는 끊겨가는 아리랑의 맥을 잇겠다고 결심했다.

소리를 하며 살아야겠다는 결심이야 이전부터 했지만, 불러야 할 소리가 무엇인지, 어떤 아리랑의 대를 이어야 하는지 정해진 것은 1997년 그 대회장에서였다.

凡人의 생에 맡겨진 전수의 업

고된 몸의 소리 토로하는 힘겨운 음절 정제작업
전문가 아닌 제한된 여건의 개인에겐 힘겨운 과제
병마와 싸우면서까지도 채록 등 멈추지 않아


문경아리랑은 음악적으로는 가다듬어지지 않은 노래였다. 송영철 옹과 송옥자 씨 모두 전문 국악인이나 유명인이 아닌 제한된 여건 속의 개인들이다. 그러다보니 음악적으로 정제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뛰어난 음악적 재능으로 민요를 꾸준히 공부해왔던 송옥자 씨는 송영철 옹의 소리를 토대로 박자를 가다듬을 수 있었다.

2004년도에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을 하고 1년 뒤 남편이 뇌졸중으로 와병하게 되었을 때도, 병원에 입원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문경의 민요와 아리랑을 50여 수 노트에 채록하는 등 아리랑에 대한 집념이 상당했다. 송옥자 씨의 이러한 노력은 여러 경창대회에서 수상의 영예가 되어 돌아왔다. 연로한 문경아리랑의 전수자는 그렇게 해서 다행히 대를 잇게 된 것이다.

문경 아리랑이 어떻게 대물림되었는지 들여다보면 파란만장한 두 인생이 아리랑 곡선을 그리며 교차하는 것이 보인다. 송옥자 씨가 태어나던 해인 1951년은 송영철 옹이 징용을 다녀온 지 6년이 지난 시점이다. 밭에서 일하다가 사할린 탄광으로 끌려가 태평양전쟁을 겪고 하와이와 중국을 거쳐 고국으로 돌아온 송 옹은 귀환할 때 바지 주머니에서 사할린 광산에서 밥그릇으로 사용한 조개껍데기와 물병으로 사용한 소라를 가지고 온 것을 꺼내어 보여주었다고 한다.

 

▲ 문경새재 아리랑비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송옥자 씨
▲ 문경새재 아리랑비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송옥자 씨

송 옹이 어째서 진정한 전승자인지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가 바깥에서 불렀던 노래는 외국으로 떠나기 전 고향에서 익힌 노래다. 그의 노래가 그 누구의 노래와도 다른 이유는 고향을 강제로 떠났던 경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리꾼의 삶을 생각하며 아리랑을 들으면 전통과 우리 사이에 가로놓인 굴곡의 차이도 들려온다. 가히 태평양을 반 바퀴 돌았다고 해도 될 만큼 파란만장을 살아온 송 옹과 같은 분들이 적지 않다.

징용으로 끌려간 이들에게 고향의 노래가 무슨 의미인지 더 물어서 무엇하랴. 이때 부르고 듣는 아리랑의 무게를 우리는 감히 짐작도 못한다. 그가 부르는 것은 끌려간 당시의 동포들이 들었던 바로 그 아리랑이다.

그가 불렀을 아리랑은 지구상에서 아리랑을 가장 절절하게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의 바로 그 곡조다. 후대의 한국 영토 안에서 우리가 볼 수 없었던 그 아우라를 송 옹의 노래는 갖고 있었다.

지역아동센터에서 10개월 동안 민요를 가르쳤던 이춘자(55) 씨는 “어른들도 잘 모르는 아리랑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걱정을 했는데 아이들이 의외로 잘했다. 그런데 송영철 할아버지의 소리는 민요에 재미를 붙인 아이들조차 재미없다며 꺼려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송영철 옹의 화면을 방과 후 교실 한 벽면에 띄우는 순간, 아이들의 반응은 분명하다. 아이들은 그 노래를 좋아하지 않았다. 장송곡 같다는 것이 이유다.

문경아리랑은 아이들이 알 수 없는 경험이 담겨 있고,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녹아 있는 문경의 소리였다. 아리랑의 곡조를 가르칠 수는 있지만 아리랑에 실린 경험과 상처까지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이들의 반응은, 전통이 그냥 전달되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준다. 전통이 소중한 줄을 아는 이들은 투박한 소리와 소박한 몸짓에서 의미를 찾아낼 줄도 알지만, 그런 맥락을 알 턱이 없는 어린 눈들의 감각에는 전문 소리꾼의 카리스마가 필요하다. 탄복할 만한 것이 있어야 끌린다. 전통이 어린 재능을 알아보고 일찍부터 준비시키려면 전통 또한 기예로서 힘이 있어야 한다.

우리사회가 함께 전수해야 할 아리랑

징용 다녀온 송영철 옹 삶의 무게감이 실린 가락
어린 전수자들에겐 낯선 감성으로 다가와 불편
유산으로 남기려는 소수의 희생 값지게 평가해야


송옥자 씨 회고담을 통해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열 살 때 그녀는 금동마을 장터에서 사당패 경기민요를 듣고 소리꾼처럼 살고 싶다는 욕심을 가진다.

그때만 해도 민요는 이른바 민중의 노래라고 할 수 있었다. 볼거리 환경 자체가 지금처럼 요란하지 않았으리라 여기기 쉽지만, 근대화된 장터에 나타난 민속음악단에겐 아이의 흥미를 돋울만한 요소가 그만큼 있었다는 것이다.

송영철 옹의 진솔한 아리랑을 기예로 다듬으려 노력한 송옥자 씨가 열다섯 살에 소리 공부를 하고 싶다고 대전의 아버지에게 편지했을 때, 그녀가 들은 것은 “기생이 되려고 하느냐”는 호통이었다. 아버지 세대의 이런 반응이 낯설지 않음을 우리는 안다. 아이가 아니라 성인으로서도 전통의 맥을 잇기 위해 인생을 바치는 일이 명예롭다면, 그 명예는 결과로나 올 일이다. 가족에게나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을 일이었다.

그런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기가 안 그래도 두려운 마당에 재능까지 갖추어야 한다면, 그런 사회에서 전통이 전승되기란 힘들 것이 당연하다. 아리랑은 요컨대 다수의 유산으로 남겨야 하는 만큼 소수의 재능을 필요로 한다. 소수의 재능이 필요한 사회가 소수의 희생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면 그 사회는 합의를 통해 뭔가를 마련해야 한다.

 

▲ 2013년 개최된 `문경새재 아리랑제` 행사 중 펼쳐진 공연
▲ 2013년 개최된 `문경새재 아리랑제` 행사 중 펼쳐진 공연

1970년대 직조공장 여공이었던 송옥자 씨가 문경 출신의 옆집 하숙생과 결혼했을 때, 송영철 옹이 살던 문경은 총각들이 결혼을 하려고 해도 배우자를 찾기 어려워 도시로 나가야 했을 시기였다. 1960~70년대에 전통문화의 대를 잇는다는 것은 당시 사회의 흐름과 반대방향을 택했음을 뜻했다.

이런 종류의 관심은 1980년대가 돼서야 하나둘씩 나타난다. 문경아리랑이 본격적으로 전수되기 시작한 1980년대는 민속문화에 대한 관심은 생겨나기 시작했으나, 민속문화를 남기려는 합의가 아직은 등장하지 못한 때였다.

아리랑 전수는 발굴이 돼야 가능하다. 송영철 옹이 세상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송옥자 씨가 생활반경을 떠나 전파자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도 우선은 누군가 문경아리랑을 발굴하고 실체를 선언해주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문경엔 다행히 그런 사람이 하나 있었다.

 

송옥자 프로필 (1951년생)

1986 송영철 옹의 `문경새재아리랑`을 음반으로 접함
1995 문경시 주최 제3회향토민요경창대회 장려상 수상
1998 문경시 주최 제6회향토민요경창대회 장원 (문경새재아리랑)
1998 경상북도 주최 제5회향토민요경창대회 우수상 수상(문경새재아리랑)
1999 경상북도 주최 제7회향토민요경창대회 장려상 수상(문경새재아리랑)
2000 제2회 전국향토민요경창대회 (상주)장려상 수상(문경새재아리랑)수상
2001 제3회 전국향토민요경창대회(상주)장려상 수상(문경새재아리랑)수상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결성
2005 경북도주최 제11회향토민요경창대회 (상주)최우수상 (문경새재아리랑)
2006 대구KBS 다큐 `영남의 민요` 3부작 출연
2008 `문경의 민요와 아리랑을 찾아서` (문경시·2008년)에 자료제공
        제1회문경새재아리랑제 주관, 문경아리랑 108수 발표
2010 제2차 한국구비문학대계 문경 편 문경아리랑 108수 제공

강남진 기자/이소연 시인

    이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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