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띠군. 원숭이들은 감각이 있지
빨라. 매사에 적극적이고
하지만 참을성이 부족한 게 탈이야”

와인 얘기가 나오자 노인의 눈에는 광채가 돌았다.

ㅡ와인? 좋지. 나 와인 좋아해. 가만있자. 이 동네 와인집이 어딨더라.

우리는 노인이 적당한 포도주집을 떠올릴 때까지 끈기있게 기다렸다.

ㅡ인사동에 나와본 지 꽤나 오래돼서 말야. 아, 그 수도약국 근처에 펠러라고 있었지. 마담이 꽤 미색이었는데. 최형, 거기로 가봅시다.

ㅡ그러시죠.

최선배와 나는 노인을 따라 스타벅스에서 나와 어둠이 내린 인사동 거리로 잠입해 들었다.

ㅡ요즘은 어딜가나 시끄러워. 옛날이 좋았어.

ㅡ그렇지요.

ㅡ이 동네만 해도 그전엔 이렇쟎았어.

거리 곳곳에 넘치는 사람들 행렬이 노인은 꽤나 못마땅한 듯했다. 수도약국 앞에 다다르자 노인은 기억을 더듬었다.

ㅡ이쪽이 맞는 것 같군.

ㅡ이런 골목이 있었군요.

ㅡ자주 오는 사람도 잘 모르지. 아는 사람이나 들르는 데야.

과연 노인을 따라 들어간 골목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은밀했다. 우리는 좁은 골목길을 일렬 종대로 서다시피 노인 뒤를 따랐다. 골목 안에서 오른쪽으로 한번 꺾어들자 작은 술집 간판이 보였다.`일루쏘`라고 했다.

ㅡ분명 여긴데? 간판이 바뀌었어. 환상적이라니, 재밌군. 들어가 봅시다.

노인이 앞장을 섰다. 좁은 출입문 너머로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테이블이 고작 셋밖에 없다.

ㅡ어서오세요!

우리를 맞이한 마담은 마흔이 좀 넘었을까 하다. 화장이 짙다.

ㅡ처음 오셨어요?

나는 마담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비음에 신경이 쓰였다.

ㅡ구면은 아니지. 아직도 와인 파나?

ㅡ네. 하지만 저희집은 값이 좀 나가는 것만 취급해요.

ㅡ그건 안 변했군.

ㅡ여기 오신 적 있으시군요.

ㅡ주인이 언제 바뀌었지?

ㅡ한 삼 년 됐어요.

ㅡ세월 빠르군.

마담은 우리를 홀 한가운데 좋은 소파에 앉게 했다.

ㅡ뭐로 할까? 난 싼 건 안 마셔.

ㅡ저희가 뭘 압니까.

최선배가 노인을 향해 씨익 웃었다. 처분에 맡긴다는 표정이다. 술냄새만 맡으면 취재고 뭐고 만사 제치고 달려가는 최선배다.

노인은 마담이 가져온 메뉴판의 어느 한 곳을 손가락으로 짚는다. 홀이 어두운데, 노인은 돋보기도 필요없다.

ㅡ이게 어떨까? 레르미타. 스페인산. 꽤 좋아.

ㅡ비쌀 텐데요?

최선배는 레르미타가 어떤 술인지 알고 있는 눈치다.

ㅡ저희집은 가격을 터무니없이 매기진 않아요.

마담이 은근한 목소리로 결정을 재촉했다.

ㅡ이걸로 하지. 알바로 팔라시오스 레르미타 2011년산. 그러고 보니 와인 마셔본지 오래됐군.

마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안주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고 주방쪽으로 물러갔다.

ㅡ이 친군 아직 젊군. 좋은 때야.

노인은 비로소 내게 관심을 나타냈다.

ㅡ우리 회사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글은 좀 씁니다.

ㅡ그래? 고마워. 변변찮은 사람 책을 다 만들어 준다니.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점수라도 매기려는 듯 내 쪽을 건너다 본다.

ㅡ제대로 쓸 겁니다. 문장력도 있고 구성도 잘 하니.

ㅡ차차 얘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와인이나 마시지.

ㅡ덕분에 좋은 와인을 마시게 됐습니다.

나도 비로소 한 마디 했다.

ㅡ이 집에서는 한 이백오십 할까?

마담이 와인을 가져와 노인 옆에 앉자 분위기는 한결 밝아졌다. 마담이 와인을 다 따르자 노인은 여자에게도 술을 권했다.

ㅡ마담도 한 잔 하지?

ㅡ고맙습니다.

마담이 사양하지 않고 글라스를 가져왔다.

쨍, 째쟁.

와인 글라스 넷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했다. 노인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입속의 와인을 음미했다.

ㅡ좋군. 마담은 결혼했나?

ㅡ어머, 별걸 다 물으세요. 갔다 왔어요.

ㅡ호오. 저와 사정이 같군요.

아까부터 마담의 볼륨감 있는 몸매에 눈길을 던지던 최선배가 수작을 붙였다.

ㅡ잘 됐군. 두 분이 잘 해보시게.

ㅡ저는 여자라면 질렸습니다. 한회장님께서 신경 써보시죠.

최선배는 딴청을 부리면서도 눈은 마담에게서 떼지 못했다.

ㅡ나는 이제 늙었어. 수술도 세 번씩이나 했고.

암이 거듭 재발해서 몹시 고생하고도 끄떡없는 노인네라고, 약속장소로 나오면서 최선배는 귀띔해 주었다.

ㅡ연형은 결혼했나?

ㅡ아직 못했습니다.

ㅡ벌써 했어야 할 것 같은데?

ㅡ그런가요?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결혼을 한다, 누구 좋으라고? 결혼하고, 애낳고, 처자식한테 시달리면서 산다, 혼자 살기도 벅찬 이 나라에서? 어림없는 소리다. 나야말로 비혼주의다. 결혼 하지 말고 혼자서라도 값있게 살다 가자는 주의다.

ㅡ이 친구, 아주 여유만만입니다.

ㅡ그것도 좋지. 그러고 보면 결혼이라는 건 아주 이상한 제도야.

ㅡ그렇죠.

나는 당연하다는 듯 응수했다.

ㅡ요즘엔 옛날 생각이 자꾸 떠올라. 박통 시대라 그런지, 원. 당신들, 내가 그 시절 얘기 한 번 해드릴까?

ㅡ이탈리아에 옷 납품해서 큰 돈 버셨다는 말씀요?

ㅡ그때 외국 여자랑 결혼까지 한 얘긴 안 했을 걸?

ㅡ어머, 외국여자요? 사모님이 외국분이세요?

마담의 음성에 호기심이 담겼다. 한 노인의 회고록을 집필해 주라던 최선배도 그런 얘기는 없었다.

노인은 와인 글라스를 천천히 입으로 가져가 목을 축였다.

ㅡ내가 옷장사로 돈 벌기 시작한 건 최기자도 잘 알 테고.

ㅡ유명한 얘기죠. 이탈리아 밀라노 무역 루트를 처음으로 뚫으셨다는.

ㅡ벌써 오십 년 가까이 됐군.

노인의 두 눈이 옛 일을 더듬는다. 나는 이런 타입의 노인을 잘 안다. 틈만 나면 왕년의 활약상을 떠벌리고 싶어 안달이 난 노인네들. 자수성가한 사람일수록 골치가 아프다.

ㅡ옛날 얘길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했지. 이젠 다 시들해. 그런데? 요즘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은 일이 자꾸 떠오르는군.

ㅡ사모님이 경주 사람인 건 제가 잘 알고. 어디 외국에 현지처라도 두셨습니까?

ㅡ글쎄. 그게 뭐였는지 나도 잘 모르겠고.

ㅡ우선 한 잔 합시다. 사연이 있으신 듯한데.

최선배가 글라스를 들자 마담이,

ㅡ그래요!

하고 눈동자를 빛냈다.

우리들은 엉덩이가 둥근 글라스를 들어 서로 부딪쳤다.

ㅡ그러니까, 그게.

기억을 더듬는 노인의 얼굴은 어느덧 황홀한 빛에 감싸인듯 했다. 확실히 와인이 좋아서인 것도 같다.

이윽고 노인이 눈을 떴다. 순간, 그의 눈동자가 젊은이의 눈빛으로 번뜩이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 눈은 분명 쭈글쭈글한 노인의 눈이 아니었다.

ㅡ그때, 정외과 동창들이 거리로 나설 때 나는 무교동에 나가 주먹들하고 어울렸어. 그치들도 나를 쉽게 보지 못했지. 주먹은 돈에 눌리는 법이니까. 그치들하고 밤거리 노방꽃들 꺾는 재미가 쏠쏠했고. 군대는 부친이 힘써 줘서 신경 쓸 것도 없었고. 세상이 다 내것이야. 그러다 졸업장이랍시고 따놓으니 부친이 일을 하나 떠맡기시더군.

ㅡ그게 밀라노 무역이었죠?

ㅡ최형은 내 인생을 꿰고 있군. 빈둥빈둥 날건달로 지내는 게 못마땅하셨던 모양이야. 헌데, 난 그게 아녔어. 야심만만했지. 뭐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어. 내가 어떻게 결혼했는지 알지?

ㅡ모 여대 메이퀸 출신이라고 하셨죠?

최선배는 한회장을 상대해 온 인연이 깊었다.

ㅡ그렇지.

ㅡ회장님 색소폰 연주에 반해서 결혼 안 시켜 주면 죽어버린다 하셨다죠?

ㅡ어머, 대단하시다.

마담이 놀란 목소리로 한 회장을 치켜올렸다.

ㅡ우리 부친 사업도 웬만은 했지만, 장인은 당시에 이미 백화점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었어. 결혼을 반대한 것도 이상할 것은 없지.

ㅡ그럼, 애정의 도피행각이라도 벌이셨나요?

ㅡ그땐 어디든 데리고 가서 하룻밤 지새면 그걸로 끝이었으니까.

ㅡ어머, 정말요?

ㅡ제주도까지 데리고 가신 건 또 뭡니까? 서울 근교에도 별장 같은 게 많았을 텐데.

ㅡ그래야 확실하지 않나. 지금이야 마나님한테 내가 꼼짝도 못하지만, 그땐 그쪽에서 나한테 죽고 못 살았어. 나만 좋다면 같이 죽어도 괜찮다고 했으니까.

ㅡ멋있으시다!

ㅡ그렇게 흥미롭다고 할 수는 없는데요? 혼사장애 극복 스토리라.

나는 비위가 상한 것을 감추지 못했다.

ㅡ내 서론이 길어졌나 보군. 연형이 이제 서른 여섯이랬던가?

ㅡ예.

ㅡ원숭이띠군. 원숭이들은 감각이 있지. 빨라. 매사에 적극적이고. 하지만 참을성이 부족한 게 탈이야.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전에 있던 직장에서 뛰쳐나온 것도 아니꼬운 일을 참지 못한 탓이었다.

ㅡ이쯤에서 다시 한 잔 하시죠, 회장님?

최선배가 분위기를 누그러뜨려 주었다.

ㅡ그러지. 오늘 따라 맛이 좋군.

우리들은 또 글라스를 쨍그렁 부딪쳤다.

ㅡ대통령이 새로 취임식을 한 때니까 7월 좀 지나서였지, 아마? 그땐 대통령이 한여름에 취임을 했어. 갑자기 밀라노에 갈 일이 생겼어. 그쪽에서 대금을 차일피일 미루는 통에 울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있어야지. 이것들 봐라. 아시아 끄트머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나라라고 얕잡아 보시겠다? 가서 뽄때를 보여 주겠다는 오기가 발동한 거야.

ㅡ회장님다우십니다.

ㅡ부친께 말씀드렸지. 내친 김에 좀 놀다 오겠다고. 헌데, 와이프가 문제야. 데리고 갈 수도 없고.

ㅡ흐흐. 부부동반하시면 꼼짝도 못하실 테니까.

ㅡ어휴. 남자들은 다들 왜 그러죠? 젊은 사람이나 나이든 분이나.

ㅡ그때 마침 와이프가 아이가 들어 있었거든. 한 칠 개월 되었던가. 한회장이 말을 끊고 기억을 더듬다가 동의를 구하듯,

ㅡ조강지처는 역시 무시할 수 없잖소?

하고 우리들을 훑어봤다. 그는 이 바닥에 소문난 난봉꾼이었다.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노인의 얼굴에 만족감이 어렸다.

ㅡ그래도 가긴 가야겠고. 솔직히 말하면 좀이 쑤셔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ㅡ그러면 그러시지.

ㅡ하는 수 없이 하루저녁 시간을 내서 와이프를 식탁 앞에 앉혔지. 이러이러 해서 안 갈 수가 없다. 한 이주일이나 더 있겠느냐. 돌아오는 길에 이탈리아 명품을 사다 주겠다. 와이프 낯빛이 영 좋지 않더군. 무슨 죽으러 가는 사람 보듯 말야. 그보다 제 신셀 걱정한 거겠지. 애 낳다 죽는 여자도 많던 시절이니까.

ㅡ그러셨겠어요!

ㅡ결국은 내가 화를 내는 체 했지. 무슨 큰일 났다고 질질 짜느냐고. 여자들 마음은 알 수가 없어. 툭 하면 눈물을 짜내니.

ㅡ요즘 여자들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다들 안구건조증에 걸렸죠.

솔직히 나는 여자들에게 질려 있었다. 지긋지긋하게 계산적이라고나 할까. 누가 그랬다. 여자들은 이것저것 따져대는 게 본능이라고. 아이를 직접 낳아 길러야 해서 생긴 습성이라던가. 이해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혐오감마저 버릴 순 없다.

ㅡ김포에서 비행기를 타고 나니 속이 다 후련하더군. 도쿄 긴자에서 놀아본 것도 몇 년 만이었고. 하네다 공항에서 카라치 경유해서 로마 가는 비행기를 탔지. 그땐 일본항공밖에 없었어. 이탈리아 가려면 꼭 일본을 거쳐 갔어. 다빈치공항에 도착하니 완전히 딴 세상이야. 좁아터진 섬나라 같은 땅에서 살던 놈 눈이 번쩍 뜨이더군. 사실, 우린 일본보다 더한 섬나라잖소. 거긴 달라.`로마의 휴일`이라는 영화 있지? 그 영화 속 로마 그대로야.

ㅡ오드리 햅번!

ㅡ마담도 제법이군. 나이도 많쟎아 보이는데. 현실은 영화 속하곤 다르다지만 한국에서 날아간 내겐 로마가 꼭 영화 속 세상였어. 하루아침에 아파트가 무너져내리는 서울이 현실이라면 로마는 고대의 폐허로 가득 찬 꿈 세상였어. 그 해에 와우아파트가 무너졌지.

한회장은 또 눈을 가늘게 뜨고 옛일을 더듬었다.

ㅡ어렸을 때 좋아했어요. 오드리 햅번. 같은 여자 눈에도 어찌나 예쁜지!

ㅡ그 여자도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 인생, 짧아. 눈 한 번 깜빡 하면 십 년이 가버려. 아무튼, 밀라노로 달려가 납품 대금을 받아내고 나자 뱃심이 두둑해지더군.

ㅡ얼마나 되었죠, 그땐?

ㅡ기억 안나. 그냥 많았어. 수출 십억 불을 달성했다고 요란들 했을 땐데, 내가 그 수출 역군인 셈이었지.

ㅡ고색창연하군요.

나는 빈정거렸다.

ㅡ이 친군 글 쓰는 사람답군. 그때 내 공장이 청계천 평화시장에 있었어. 거기서 연말에 재단사가 제 몸에 불을 내기도 했지만 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나라가 큰 거야. 로마로 돌아와서 사흘이나 놀았나? 푸지게 먹고 마시고 놀고. 부친하고 와이프 줄 것도 좀 사고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지.

ㅡ역시 파키스탄을 거쳐서죠?

ㅡ왕복으로 끊었으니까. 그런데, 비행기 안에서 일이 벌어진 거야.

ㅡ비행기에서 운명의 여자라도 만나신 거예요?

ㅡ너무 싱거운데요? 일본 여자였습니까?

최선배도 기대했던 만큼 실망스럽다는 표시를 냈다.

ㅡ기다려 보시게. 마담, 이 치즈는 어디 거지?

ㅡ마음에 안 드세요? 덴마크에서 들어온 거예요.

ㅡ나쁘진 않군.

마담이 안도하는 표정으로 한회장의 글라스에 와인을 더 따랐다.

ㅡ오랜만에, 정말 좋군. 지난번에 수술 받은 후론 통 술을 안했거든. 주치의는 와인 정도는 상관없다 했지만.

ㅡ대단하십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한 번도 힘든 수술을.

ㅡ완치되신 거예요, 그럼?

ㅡ내 목숨줄이 질기긴 질긴 모양이야.

ㅡ그래서 어떻게 됐죠?

인내력이 부족한 내가 탈선한 이야기를 제 자리로 돌렸다.

ㅡ음.

한회장은 와인 한 모금으로 입술을 축였다. 그의 입술은 포도주 때문인지 젊은 사람처럼 붉어 보였다.

우리는 어느새 한 회장의 이야기를 계속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ㅡ난 비상구 옆 창가에 앉았는데, 옆에 운 나쁘게도 사내 녀석이 앉았어. 얼핏 보니 일본 여권이야. 그런데 청바지에 머릴 길게 기르고 수염까지 덥수룩해. 미국서 유행하던 히피 흉내를 낸 거지.

배낭은 다 떨어졌고. 가만 보니 꽤 배운 놈야. 먹물들은 어떻게 하고 다녀도 티가 나거든.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먹물들한테 아무 관심도 없어. 오늘 한 말을 내일이라도 당장 뒤바꿀 수 있는 게 그놈들이니까. 이번에 국정화니 뭐니 시끄러웠지? 나야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봐. 하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반대한다던 작자들이 손바닥 뒤집듯 입장을 바꾼 걸 보면 구역질이 나. 그런 것들이 배웠다고 행세를 해대고.

ㅡ누굴 말씀하시는지 알겠습니다.

ㅡ난 누구라고는 말 안 했네.

ㅡ얘기나 계속해 주시죠.

ㅡ그런데 이 작자가 나한테 슬금슬금 말을 붙여오는 거야.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 어디 갔다 오느냐, 로마는 어떻더냐. 하는 수 없이 돈 받아 가노라고 대답해주고 나도 되는 대로 물었지. 넌 고향이 어디냐. 공부하는 놈이냐. 어디 갔다 오느냐. 그 친구 말 참 많더라구. 홋카이도 출신으로 도쿄대 정치과를 나왔다더군. 폴 브라이트 장학금으로 하버드에 유학했고. 공부 마치고 귀국할 때, 일부러 유럽으로, 서남아시아로, 인도로 돌아 들어갔다나. 세계시민이라는 게 되려고 그랬다더군. 피식 웃음이 나오더군. 그래서 그렇게 노란 히피가 되었냐? 물론 그 놈한테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

ㅡ미국이 베트남하고 한창 전쟁할 때죠?

ㅡ그렇지. 이럭저럭 비행기가 파키스탄 카라치 공항에 내려앉을 때가 됐어. 이 친구가 대뜸 나한테 결혼해 보고 싶잖냐는 거야. 나는 이미 결혼한 몸이라 했더니, 괜찮다, 돈만 있으면 또 할 수도 있다, 그러는 거야.

 

“칠십 다섯 평생 깨달음…
세상에 돈으로 안되는 일은 없어
단 한가지, 저 세상으로 지고 갈순 없지”

ㅡ어머,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ㅡ자기가 그렇게 놀아봤다더군. 좋다고. 한 번 더 해보고 싶다고.

ㅡ별놈이군요.

ㅡ귀가 솔깃하더군. 평범하게 노는 일엔 신물이 나던 참에.

ㅡ세상에!

ㅡ공항에서 동쪽으로 몇 시간 달리면 작은 마을들이 나오는데 거기서 파키스탄 처녀하고 전통 혼례를 치를 수 있다더군.

ㅡ그게 가능했던가요?

ㅡ사업은 어떻게 하구요?

ㅡ그보단 사모님은요?

ㅡ긴가민가하긴 했지. 사업이야 하루 이틀 늦는다고 큰일 날 것도 없고. 와이프야 알 턱이 없고. 한번 제대로 놀아보자는 심산이 생기더군.

ㅡ기가 막혀, 어쩜!

ㅡ막상 공항에 내릴 때쯤 되니 캄캄한 밤이야. 공항을 나서자마자 그 친구가 택시를 잡아타고 무어라고 하니,운전수가 씨익 웃어. 그때, 소름이 끼치더군.

ㅡ그때도 그쪽이 무서웠던가요?

파키스탄 하면 알 카에다니 빈 라덴밖에 떠오르는 게 없는 나다.

ㅡ들어봐. 택시가 덜컹거리며 달리는데,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나. 이 놈들이 서로 짠 게 아니냐. 잡아다 죽이려는 게 아니냐. 윗저고리에 넣어 둔 돈지갑에 자꾸 손이 가고. 그 친구가 내 쪽을 보고 웃는 것도 다 거짓 꾸밈 같고.

ㅡ무서워!

ㅡ술이 다 됐는데요?

ㅡ한 병 더 하지.

ㅡ어머, 그래도 되요?

ㅡ가져와 봐.

ㅡ저 오고 난 담에 계속하셔야 해요.

마담이 와인을 가지러 갔다.

ㅡ이 얘긴 오프 더 레코드야. 회고록에 넣어달라고 얘기하는 게 아냐.

ㅡ알겠습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마담이 와인을 가져와 따자 최 선배가 노인의 빈 잔을 채웠다. 그 나이에도 주량이 적지 않았다.

ㅡ어떻게 됐어요?

ㅡ두어 시간은 얼추 달린 것 같아. 캄캄해서 잘 안 보이니까 끝없이 달리는 것 같더군. 어디서 파도 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실제로 이따금 차창 밖으로 바다 같은 풍경도 보여. 나중엔 머리가 아플 지경이더군. 그러다 운전사가 뭐라고 손가락질을 하기에 보니 깊은 어둠 속으로 마을 형체가 나타나더군.

ㅡ다행이네요.

ㅡ다행은. 택시가 마을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모여. 앗살라무 알레이쿰, 이게 그 사람들 인사말이야. 나중에 알았지. 일본 친구가 운전사한테 무어라 하니, 운전사가 또 나이 든 사람한테 쑤군쑤군 해. 노인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 우릴 어떤 큰 천막으로 데려가고. 난 정신이 없는데 일본 친구는 싱글벙글이야. 돈을 내놓으라는데 안 내놓을 수도 없고. 내준 돈이 제법 컸어. 그러곤 천막 안에 앉아 기다리려니까 웬 수염 긴 노인네가 들어와. 일본 친구가 돈을 건네주니까 말없이 받아쥐고 나가버리고. 일본 친구도 내게 눈짓을 한번 보내곤 뒤따라 나가고.

ㅡ그럼 이제 혼자셨겠군요.

ㅡ고독하더군.

ㅡ그 판국에 무슨 고독이세욧!

ㅡ사방이 고요해. 갑자기. 시간은 아예 흐르잖는 것 같고. 누가 반월도라도 들고 당장이라도 목을 치러 달려들 것 같은데, 맘이 오히려 착 가라앉아.

ㅡ체념 끝의 달관이군요.

ㅡ여자는 왔습니까?

나는 기다리지 못하고 물었다.

ㅡ왔어. 한참 만에. 먼저 구수한 냄새가 나는 차가 들어오고. 접시에 음식들이 들어오고. 내가 먹는 둥 마는 둥 물리고 나자. 왔어, 여자가.

한 회장의 음성은, 마치 옛날로 돌아가 젊은 날의 자신을 눈앞에 보고 있는 듯했다.

ㅡ예쁘던가요?

ㅡ머리에 붉은 빛 히잡을 쓰고 몸에는 황금빛 긴 천을 둘렀는데, 촛불 아래 두 눈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어. 눈썹은 짙고 눈동자는 깊고.

ㅡ데려온 사람들은요?

ㅡ다들 가버렸지. 우리 둘만 남기고.

ㅡ하객들은요?

ㅡ누가 있어. 한밤에 급하게 만든 결혼식에.

ㅡ그건, 여자를 돈 주고 산 겁니다.

나는 분개한 끝에 소리를 지르듯 했다. 좋은 와인에 나도 모르게 취해 버렸는지도 몰랐다. 한회장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나를 건너보았다.

ㅡ후후. 옷을 판 돈으로 여자를 산 거지. 자넨 참을 수 없겠지만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은 없어. 내 칠십다섯 평생의 깨달음이야. 한 가지만 빼놓고 말일세.

ㅡ그런 게 있어욧?

ㅡ뭐죠?

ㅡ돈을 저 세상으로 지고 갈순 없지.

ㅡ기가 막혀욧.

마담도 와인에 취해 버린 듯했다.

ㅡ아무리 돈이 많아도!

최선배가 탄식을 했다.

ㅡ여자는 지금 어떻게 됐습니까? 죽었나요?

나는 돈 문제보다 여자의 사연이 더 궁금했다.

ㅡ글쎄.

ㅡ글쎄라니요?

ㅡ마담. 한 잔씩 더 따르게.

ㅡ어머, 죄송해요.

마담이 한회장 잔부터 다시 와인을 따랐다. 한 회장은 술잔을 들고 붉은 와인빛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술잔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보는 듯도 했다. 우리는 그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할 때까지 기다렸다.

 

다음날 아침 인중은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감은 채 그는 여자가 자기 옆에 그대로 머물러 있음을 알았다. 여자의 따뜻한 체온이 포근한 면이불 안에 고루 스며들어 있었다. 인중은 한밤의 일들을 천천히 떠올렸다. 여자는 마치 인중의 나라의 옛날 색시처럼 수줍고 순종적이었다. 인중의 손길이 이끄는 대로 몸을 가만히 움직여 둘은 마침내 하나가 되었고, 인중은 낯선 나라의 여인의 몸이 선사하는 쾌락을 만끽했다.

인중이 몸을 일으키자 여자도 인중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으로 나오자 날은 이미 환하게 밝아 있었다.

어른들은 어디로들 갔는지 없고 아이들 몇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인중을 씻을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었다. 마을 한쪽에 자그마한 우물이 있었다. 거기서 인중은 마을의 여인네들을 만났다.

인중의 여자가 그네들을 향해 인사를 드리자 그네들은 웃음으로 두 사람을 맞이해 주었다. 그네들은 인중의 여자를 보고 사미나라고 불렀다. 인중은 비로소 자기 여자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여인네들은 한밤에 찾아든 인중을 별스럽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물론 착각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렇게 믿음으로써 인중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미나와 함께 천막으로 돌아온 후 인중은 일본 친구의 방문을 받았다.

그 또한 밤사이에 마을의 다른 처녀와 결혼을 한 참이었다. 일본 친구가 물러간 후 여자는 인중을 마을에서 가까운 바다로 데려갔다.

들판 사이로 난 희디흰 흙길을 걸어 나가자 물결 잔잔한 바다가 나타났다. 밤 사이에 어디선가 가물가물 들려오는 것 같던 파도소리, 그게 환청이 아니었음을 인중은 깨달았다.

인중은 그 바닷가에 서서 드넓게 펼쳐진 인도양의 바다 물결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가없이 넓고 푸르렀다. 인중은 자신이 지금 파키스탄 어느 바닷가 아닌, 세상의 어느 끄트머리에 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말로 아무도 자기를 아는 이 없는 곳, 자기가 쓰는 말을 아무도 쓰지 않는 곳에 와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새로 인연을 맺은 여인과 함께 낮에는 물고기를 잡고 밤에는 사랑을 속삭이며 살아갈 수도 있었다.

이 낯선 세상의 이방인으로 삶을 마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 될 것 같았다.

일곱 개의 낮과 밤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이곳에서 시간은 차라리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낮이 가고 밤이 오기를 거듭해도, 또 하나, 그리고 또 하나의, 해와 달의 공간이 펼쳐질 뿐인 나날이었다.

밤이면 새로 얻은 오두막집에서 사미나의 매끄러운 몸을 끌어안고 사랑의 향연을 벌였다. 낮이면 바다로 들로 산으로 소풍을 나가 낯선 곳들이 자신의 영지가 된 듯한 기쁨을 맛보았다. 그 일곱 번째 날에 인중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ㅡ사미나. 나, 한국에 다녀올 게.

여자는 물론 인중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인중이 꺼내 보인 여권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결국 눈물을 쏟아냈다. 인중은 흐느껴 우는 여자의 등을 쓸어 주었다. 이때 비로소 인중은 자신이 이 여자와 결혼했음을 실감했다. 비록 가난한 마을을 위해 희생양으로 바쳐졌을망정 그녀는 그의 새로운 여자였다. 때문에 인중은 차마 그냥 떠나겠다고 할 수 없었다. 양복 안주머니에서 돈봉투를 꺼내 짚이는 대로 뭉텅 여자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ㅡ한 달만 있다 올게. 다 정리하고.

그는 여자를 향해 집게손가락을 펴들어 보였다. 여자가 물에 젖은 눈동자를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중은 자기가 펴든 손가락이 여자에게 한 달을 의미하는지, 일 년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음날 공항으로 인중을 데려다 줄 택시가 왔다. 인중은 일본 친구에게 먼저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는 웃으며 그러라고 했다.

자기는 좀 더 놀다 떠나겠노라고 했다. 여자는 슬픈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다. 그러나 인중은 여자를 다시 안아 주지 못했다. 택시의 뒷유리창으로 저만치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인중은 마침내 마을을 떠났다. 그러면서도 인중은 마을 부근의 지형을 기억 속에 남겨두려 애썼다. 마을의 이름은 이미 수첩에 적어 두었지만 기억만으로도 이곳을 찾아올 수 있었으면 했다.

 

여기까지 듣고는 우리들은 제각기 자기 방식대로 반응을 나타냈다.

ㅡ사미나가 너무 불쌍해요.

ㅡ여자는 정말로 자기가 결혼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중에서도 나는 날카롭게 따졌다.

ㅡ그 뒤로 여자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한회장은 얼굴에 긍정도, 부정도 아닌 웃음을 띄웠다.

ㅡ한국에 돌아오니 아내가 몸이 말이 아니더군. 마음고생 때문인지 결국 아홉 달을 다 못 채우고 아이를 낳았어.

ㅡ지금 사업을 맡고 있는 큰아드님 말씀이죠?

ㅡ게다가 공장 분위기도 살벌했어. 예전 같으면 먹여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하던 것들이 근로기준법을 걸고 나오지 않나. 그런 중에도 여기저기서 납품 건들은 쏟아지고. 귀국하자마자 여자 일은 까맣게 잊었어. 억지로 잊은 게 아니라 잊혀버린 거지.

ㅡ너무해요!

마담은 같은 여자의 마음으로 억울해 했다. 한회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와인으로 목을 축이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ㅡ그런데 삼 년쯤 지나 또 밀라노엘 가게 됐어. 그러자 까맣게 잊고 있던 여자가 생각나더군. 마을에서 다시 시집을 갈 수는 없었을 테고. 혹시 내 씨라도 가졌던 건 아닌지, 그렇다면 내 아이가 자라고 있을지도 모르고. 또, 파키스탄이 인도하고 전쟁을 했다는데, 그 통에 어떻게 된 건 아닌지. 온갖 생각이 다 나더군. 그제야 여자가 걱정이 됐어. 그래, 이번에는 마음먹고 일정을 잡았어. 지난번에 카라치에서 귀국할 때 아주 애를 먹었거든.

ㅡ그럼, 다시 만나신 거예요?

마담의 목소리에 기대가 담겼다.

ㅡ마을은 그대로 있던가요?

최선배는 기자다운 호기심을 표명했다.

ㅡ카라치에 내려서 우선 호텔에 들었어. 여자를 만나러 오기는 했지만 정말 만나야 할지 망설여지더군. 나와 그 여자의 인연은 삼 년 전의 이별로 끝나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ㅡ결국 안 만나셨다는 말씀인가요?

정말 그렇다면 나는 이 노인네의 회고록을 쓰지 않을 작정이었다.

ㅡ망설이기는 했지.

ㅡ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ㅡ그렇지? 하지만 결국 호텔에 머무르면서 나를 마을로 데려가 줄 택시 운전사를 찾았어. 물론 영어를 아는 자로.

ㅡ사미나 혼자 사내아이를 키우고 있었을 거 같아요.

ㅡ이제야 말이지만, 로마에서 사미나에게 줄 선물을 샀어. 처음 만난 게 칠 월이었으니까 루비를 샀지. 반지로.

ㅡ어쩜, 사미나가 너무 좋아했을 거 같아요!

마담의 눈빛이 황홀해졌다.

ㅡ막상 만나려고 마음을 굳히니 조바심이 나더군. 다음날 아침 해가 뜨자마자 아침밥도 거르고 택시를 불렀어.

ㅡ잘 하셨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노인을 칭찬해 주었다.

ㅡ세 시간쯤 달렸는데 마을이 보이지 않더군. 세월이 지났어도 마을 이름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운전사한테 물어보니까 조금만 가면 된대. 그래도 전혀 낯선 곳 같아.

ㅡ운전사가 엉뚱한 곳으로 데려간 게 아닐까요?

ㅡ이상하게 생각할 때쯤, 과연, 작은 표지판이 보이는데, 바로 그 마을이야. 그런데도 마을은 전혀 딴판이야. 지형도 예전 같지 않고.

ㅡ이름만 같은 다른 마을였군요.

최선배가 그럴듯한 추리를 제출했다.

ㅡ그럴 수도 있지. 차에서 내려서 운전사를 앞세우고 마을 어귀로 들어갔어. 마침 촌로 하나가 집 앞에 나와 물담배를 피우고 있더군. 가만 보니 구면이야. 삼 년 전에 봤던 노인이야. 그래, 운전사를 앞세워 다가가 인사를 했어.

ㅡ잘 되었네요!

ㅡ우리나라처럼 새마을운동이라도 했나. 마을이 달라졌게.

ㅡ전쟁통에 달라졌을 수도 있겠네요.

이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전쟁의 화마가 마을을 비껴갔기를 바랐다.

ㅡ글쎄. 어떻게 되었을까?

한회장은 얼굴에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일부러 그러는 듯 또 와인을 한 모금 천천히 들이켰다.

ㅡ여자가 분명 회장님 아이를 키우고 있었을 거 같아요.

ㅡ다른 남자랑 살고 있었을지도. 어쩌면 어떤 사람이 거둬주었을 수도 있겠죠.

ㅡ먼데로 팔려갔나요, 혹시?

ㅡ셋 다 내게는 좋은 결말이었겠지.

ㅡ그러면요?

그 순간, 나는 여자가 부족 사람들에게 명예 살인이라도 당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곳에서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ㅡ노인도 나를 알아봤어. 헌데, 반가워하다 말고 표정이 바로 어두워지더군.

ㅡ왜요?

우리 셋을 대표해서 마담이 물었다.

ㅡ내가 떠나고 난 후, 그 가을에, 해일이 닥쳤다는 거야. 마을을 송두리째 집어삼켰다더군.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더군. 우연히 다른 곳에 가 있던 자기 같은 사람 말고는.

ㅡ맙소사!

우리들은 한 사람처럼 탄식을 했다.

ㅡ사미나는 부모가 없었고, 작은 아버지 손에서 컸어. 내가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더군.

한회장의 눈동자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의 쭈글쭈글한 눈가에 물빛이 묻어난다고 느낀 것은 나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ㅡ너무 슬퍼요. 그럼, 루비는요?

마담은 새로운 의문을 표명했다.

ㅡ루비 반지는 바다에 던져 버렸어. 사미나에게 준 거나 다름없지. 허탈한 심정으로 마을 앞바다에 갔는데, 마치 사미나의 숨결처럼 바람이 불어왔어. 죄책감 같은 게 생기더군.

ㅡ노인이라도 주시잖고요?

최선배가 아까운 듯한 표정을 서둘러 얼굴에서 지워냈다.

ㅡ곧 세상 떠날 사람이 보석은 가져 뭐하게.

이것은 마치 한회장 자신을 향해 건네는 말처럼 들렸다.

ㅡ사람의 삶은 우연에 맡겨져 있지. 만남도, 헤어짐도. 역사라는 것도. 쓸려가면 다 그만이지.

ㅡ그렇군요.

ㅡ저도 이 가겔 언제 접을지 모르겠어요.

마담은 확실히 백치미의 소유자였다. 그렇다면? 이 노인은 왜 그렇게 살아온 것일까. 내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는 지난 긴 세월 동안 한 번도 싸움에서 물러선 적이 없다. 다른 기업하고도, 노조하고도.

ㅡ자네는 아직도 옳고 그른 게 있다고 생각하지?

그가 나를 보고 웃었다. 조롱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온 그의 쭈글쭈글한 얼굴은 교활한 늙은 원숭이처럼 보였다. 나는 속으로 분개했다. 하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와인 병을 들어 우리들의 글라스를 마저 채워 주었다. 최선배가 먼저 술잔을 들었다. 마담과 한회장에 이어 나도 술잔을 들었다.

ㅡ재밌는 얘길 들었습니다. 그나저나 올 한 해도 다 가버렸군요. 이제 곧 원숭이 햅니다. 제가 선창하겠습니다. 자, 원숭이를 위하여.

▲ 글 방민호, 삽화 이철진
▲ 글 방민호, 삽화 이철진
모두들 `위하여`를 외쳤다. 나도 따라 외쳤다. 오늘밤만은 그 누구와도 화해할 수 있을 것 같은 표정으로. 그러나 나는 사미나를 잊을 수 없었다. 마지막 잔은 그녀를 위하여 마시고 싶었다.

최선배와 마담이 서로에게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한회장은 유쾌한 것처럼 보이려 했지만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았다. 서울 인사동의 값비싼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회색빛에 감싸인 이천십오 년의 마지막 밤이었다.

 

<끝>

    글 방민호, 삽화 이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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