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탐사
다시 형산강에서…
(17) 옛 이야기가 흐르는 대천

▲ 이름처럼 깊은 계곡의 저수지 심곡지. 인내산에서 발원한 대천은 이곳에 모였다가 서면으로 흘러든다.

경주시 서면 도리 인내산에서 발원한 형산강은 도리와 신촌리를 가르며 흘러 심곡리(深谷里)에서 커다란 저수지를 만든다. 심곡리의 마을 생성은 그 지명 유래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 마을 개척 당시 심실(深室)이라 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피난 온 진주 하씨 경현(景賢)이란 선비가 골짜기가 깊다해서 심곡이라 개칭한 것에서 유래한다.

의상대사 창건 주사암·`모죽지랑가` 설화 품은 부산성 등
건천지역 에두른 오봉산 곳곳엔 역사의 흔적 오롯이 남아

□ 번창을 기원하는 `사라곡`

심곡지에서 흘러 나온 대천은 사라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며 좌측으로 4번 국도와 나란히 건천으로 흘러 든다. 약 1천200년 전에 밀양 손씨들이 이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마을이 번창하라는 의미로 사라곡(舍羅谷)이라고 했는데, 일제시대는 1914년 사라리로 개칭했다고 한다. 서면 일대의 명칭에서 계곡을 뜻하는 곡(谷)자가 많으며 이는 이 지역의 지형적인 특색에서 기인한다. 도리 인내산에서 발원한 대천의 지류는 곧바로 대천과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저수지를 형성해 그곳에서 물을 저장한 후 사시사철 대천에 합류한다. 이는 건천 일대의 땅이 물빠짐이 좋은 지질학적 특성으로 인해 농사를 위해 곳곳에 크고 작은 저수지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왔음을 의미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저수지들을 보유한 곳이 운대리(雲臺里)인데 특별한 이름이 없는 작은 저수지까지 모두 10여곳이 넘는다. 운대리는 1, 2리로 나뉘는데 1리와 2리의 마을 지명 유래가 운대리로 합치기 전에는 서로 달랐다. 운대2리는 부운, 운곡, 운대로 불렸는데 이 마을에 있던 부운대(浮雲臺)에서 그 지명이 유래한다. 신라 시대 선덕여왕이 이 곳의 산세와 그아래 맑은 호수의 아름다움을 듣고 유람 차 친히 행차해서 하루를 즐겼다한다. 훗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앞산에 부운대라는 연꽃 무늬의 받침 기념대를 세웠으며, 여왕이 행차 할 때 마다 채색구름이 아름답게 떠 있었기 때문에 부운대라고 칭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구름이 떠 있는 것과 같은 형상이었다고 하겠다.

□ 선덕여왕 일화 담은 오봉산

서면을 지나 건천읍으로 행정구역을 바꾼 대천은 오른편으로 오봉산 자락에 위치한 신평리를 가로지른다. 오봉산은 여근곡과 신라 침입을 위해 매복했던 백제군을 물리친 선덕여왕의 일화로 유명하다. 이후 도성 서쪽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부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골짜기를 감싼 산성을 쌓았는데 이를 부산성이라고 했다. 멀고 먼 구름 끝에 주사암이 있으니 오봉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초입에 부산성 안내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이 표지를 지나면 곧장 오봉산 정상으로 향한다. 그 경사가 제법 가파르지만 길은 복잡하지 않고 등산로로서는 잘 정비되어 있는데 이는 정상에 위치한 주사암(朱砂庵)을 위한 것이다. 일설에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당시에는 주암사(朱巖寺)라 불렀다고 전해 온다. 주사암 창건과 관련해서는 몇 가지의 일화가 전해 오는데 공통적인 것은 절 이름과 관련있는 붉은 모래가 중요한 표식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설득력 있는 창건 설화는 의상대사와 관련한 것으로 이곳에 부산성을 축성할 때 의상대사는 “이 절을 성에 두게 되면 신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다”고 예언했다고 한다. 여근곡과 관련한 선덕여왕의 일화와 부산성 축성 등을 놓고 볼 때 주사암의 창건 이유는 분명해진다.

주사암 마당을 가로질러 50여m를 좁은 산길로 들어서면 오봉산의 지세와 인근 풍광을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는 넓직한 바위가 나온다. `장군바위`, `마당바위`라고 불리는데, 김유신이 술을 빚기 위해 보리를 이곳에 두었고 그 뒤 술을 빚어 군사들과 나눠 마신 곳이 이곳이어서 지맥석(持麥石)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족히 수십 명은 앉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를 가진 이 바위는 멀리 천촌리 일대와 구룡산, 장육산의 지세가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풍광이 좋다. 이 곳은 인기 드라마였던 `선덕여왕`의 촬영지로도 유명한데 선덕여왕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을 이 곳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 오봉산 정상에 위치한 주사암 입구. 절은 아담하고 고즈넉하다.
▲ 오봉산 정상에 위치한 주사암 입구. 절은 아담하고 고즈넉하다.

□ 김극기와 주사암

한편 고려 명종 때의 문신으로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초야에서 시를 즐겼던 김극기(金克己)가 주사암에 올라 지맥석을 인용한 글이 `신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지맥석은 4면이 깎아 세운 듯하여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은데, 그 위는 평탄하여서 100명이 앉을 만하다. 김유신 장군이 여기에서 술 빚는 재료로 보리를 저장하고 술을 공급하여 군사들을 대접하던 곳이라고 한다. 지금도 말 발자국이 남아 있다.`

김극기의 묘사처럼 바위에는 여러 곳의 움푹 패인 자욱들이 남아 있다. 말을 탄 장수들이 부산성을 내려다보며 바위 위에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노라니 그 위풍당당하고 아름다운 풍광이 영화의 한 장면 처럼 펼쳐질 것만 같다.

김극기는 뛰어난 문장가로서 특히 농민반란이 계속 일어나던 시대에 핍박받는 농민들의 모습을 친근감있게 표현하였으며, 농촌 문제를 자신의 일처럼 고민했던 양심적인 지식인이기도 했다. 당시 문인들은 그의 시를 평하여 “문장의 표현이 맑고 활달하며 말이 많을수록 내용이 풍부하다”고 하였다.

노계 이인로(李仁老)는 그의 문집에서 “참으로 난새나 봉황 같은 인물이었다”고 하여 벼슬에 연연하지 않는 고고한 행적을 찬양하기도 했다. 김극기는 150여권의 문집을 남겼지만 전하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주사암에 올라 남긴 시 한편이 `동문선`에 전한다. `멀고 먼 구름 끝에 절이 있으니, 속진 떠난 경지가 거기 있구나. 새나 날아오를까 굽어 오른 하늘가에, 봉수대가 바위 위에 올라 앉았네.`

오봉산 정상 아득한 곳,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며 포기 하고 싶은 그 순산 주사암을 만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펼쳐지는 절경은 어느 곳과 비교할 수 없는 풍광을 만들며 옛 선조들의 자취까지 겹쳐진다.

□ 모죽지랑가의 무대 부산성

`모죽지랑가`의 작품 배경이 되었던 부산성지는 오봉산 산허리에 위치 한다. 서쪽 방어를 위해 문무왕 3년에 쌓았다고 `동경잡기`에 전한다. 부산성이란 이름은 생소할지 몰라도 화랑 죽지랑과 낭도의 신의를 읊은 신라 향가 `모죽지랑가`의 무대가 된 곳이다. 이 향가는 신라 효소왕 때 득오(得烏)가 지은 8구체 향가다. `삼국유사`에는 이 노래를 짓게 된 동기를 설명해주는 설화가 전한다.

그 내용을 보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화랑도가 세력을 잃어가는 과정을 반추해 볼 수 있다. 노화랑 죽지랑이 일개 아간 벼슬인 익선에게 수모를 당할 정도로 그 위엄과 위의를 상실하여간 화랑도 실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김규형<br /><br />사진작가
▲ 김규형 사진작가

`삼국유사`는 이러한 산문 기록의 아래 <모죽지랑가>의 가사를 수록하고 있다. 이 설화에 나오는 득오가 창고지기로 갔던 곳이 바로 부산성이다. `지나간 봄을 그리워하며/ 모든 것이 시름을 하는데/ 아름다움을 나타내신/ 얼굴이 주름살이 지니려 하는구나./눈 깜짝할 사이에/ 만나 뵙게 되리./ 낭이여! 그리워하는 마음에 오고 가는 길/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서 잘 밤인들 있으리까.`

오봉산 자락에서 발원한 지류들은 옛 이야기들을 담고 흘러 송선리와 신평리 일대에 크고 작은 저수지들을 형성한다. 특히 신평리 일대 지명에는 저수지와 관련된 유래와 설화들이 적지 않다. 이곳 일대에 촌락이 형성되면서 마른천(건천)의 지질학적 특성들을 저수지 조성으로 극복했음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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