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화는 아욱과 한해살이풀로 꽃말은 `어머니의 사랑`이다.
“목화는 / 일 년에 두 번 꽃이 핀다네. / 봄날 피는 꽃만이 꽃이랴. / 눈부신 꽃만이 꽃이랴.”(박노해의 시 `목화는 두 번 꽃이 핀다`)

꽃으로 솜 꽃으로 목화는 두 번 꽃이 핀다는 시를 읽으면 정순 왕후 간택 이야기가 떠오른다. 영조는 꽃 중에는 어떤 것이 제일 좋으냐고 물었다. 왕비 후보들은 저마다 모란꽃, 연꽃, 매화꽃이라고 대답했지만, 정순왕후만은 목화라고 답했다. 왕이 이유를 묻자 다른 꽃들은 한 시절만 좋은 데 불과하지만 오직 목화는 천하 사람들의 옷이 돼 사람들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공이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문익점은 1363년 이공수를 따라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뜻하지 않은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3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 고려에서는 볼 수 없는 무명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다. 목화에서 실을 뽑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려도 저런 목화를 재배하기만 하면 백성들이 따뜻하고 질긴 무명옷을 입을 수 있겠구나. 저 목화씨를 우리나라로 가지고 가야겠다.` 문익점은 백성들을 추위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당시 원나라에서는 목화씨와 그 재배 방법이 나라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1363년 귀양이 풀려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 문익점은 관리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붓두껍 속에다 목화씨를 숨겨 나오는 데 성공했다. 고려로 돌아온 문익점은 고향 산청으로 가서 장인 정천익을 찾았다. 문익점은 중국에서 어렵게 가져온 목화씨 10개 중에 다섯 개는 자신의 밭에 심고 나머지 다섯 개는 장인에게 주어 심게 했다. 문익점이 심은 씨는 모두 썩었고 정천익이 심은 것은 겨우 한 개만 싹을 틔웠다. 두 사람은 정성껏 그 싹을 키웠다. 초가을 드디어 목화가 피었다.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목화 재배에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씨를 퍼지게 하였다.

김한성 <수필가·한문 지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