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자문<br /><br />한동대 교수·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
▲ 구자문 한동대 교수·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

부모님 계신 항동에 오면 가벼운 옷차림으로 동네를 돌아보게 된다. 그린벨트로 묶여 있던 지역이기도 하지만, 빌라단지 자체가 나무들로 무성해서 서울이면서도 서울 같지 않은 곳이다. 우선 단지 중앙대로에는 마로니에 닮은 키 큰 후박나무가 넓적한 잎사귀를 달고 여러 그루 서 있다. 향나무도 많고 감나무, 대추나무, 석류나무도 많다. 부모님께서는 평생을 지방 소도시에서 사셨는데 직장을 은퇴하시고 60대 중후반에 큰 아들이 있는 서울로 오셨다. 한동안은 마포의 한 아파트에 거주하시다가 손자들이 자라나자 좀 더 고향을 닮은 항동으로 이사 오게 된 것이다.

부모님댁 전방 길 건너에는 푸른수목원이 있다. 하지만 수목원이 생기기 이전에도 이곳은 유명한 항동저수지와 항동철길이 있고 밤나무 우거진 산줄기와 논밭이 있는 곳이었다. 부모님은 이곳에 오셔서 두어평 남짓한 정원 가꾸기로 시간을 보내시며 좋아하셨다. 하지만 4년 전 아버지께서 91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이제 91세 되신 어머니께서도 정원에서 풀 뽑다 허리를 다치셔서 이제는 그마저도 하지 못한다고 아쉬워하신다.

둘째 아들인 필자는 서너 시간 거리의 포항에 사는데, 어머님을 명절 때나 뵙는 불효자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오면 입으라고 아버지의 운동복 여벌을 항상 옷걸이에 준비해 두고 계신다. 이곳에는 아버지의 옷, 화분, 책, 그리고 적어놓은 말씀 등 아버지의 흔적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아주 어릴 때부터 필자는 아버지를 따라 이 마을로 저 마을로 산보도 하고 냇가에서 물고기도 잡았었다. 지금도 4~5살 때 아버지와 함께 찾아갔던 고향마을인 청라면 장산리의 풍경이 머리에 떠오른다. 집 뒤편에 밤나무 숲이 있었고 동네 어귀에는 물레방아가 있었는데, 지금은 거대한 저수지로 변해 버렸다. 오늘도 아버지 운동복을 입고 아버지 산책하시던 길을 걸어가 본다. 빌라 담장을 따라 길게 화단이 조성되어 있는데 높다란 담장을 넘어 능소화가 줄기를 뻗어 주황색 꽃을 피우고 있다. 수목원에 들어서면 많은 나무와 꽃들이 나를 반긴다. 장미원, 메타세콰이어 숲, 갖가지 들꽃들…. 저수지의 데크로 발길을 돌린다. 이곳에는 수초가 엄청 많다. 갈대숲은 사람 키를 훨씬 넘어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한다. 수초 사이로 진흙빛 물속에는 20~30cm는 됨직한 붕어며 잉어들이 노닐고 있다.

아버지는 여가에 화초 키우기를 좋아 하셨다. 집에는 늘 갖가지 화초와 분재들이 있었다. 좀 멀리 떨어진 비탈 밭에는 손수 심어 놓으신 단풍나무, 사과나무, 감나무 등이 있었고, 은행나무는 아직도 수십 그루가 남아 있다. 아파트 발코니에 50개 넘는 화분을 지니고 있는 필자도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고 할 수 있겠다. 화원에서 구입한 대형 화분들이 아닌, 대부분 스스로 싹 틔워 길러낸 것들이다. 야자나무, 고무나무, 유카나무, 아보카도나무, 검정대나무, 겨자씨나무, 산세베리아 등….

아버지는 주변의 높고 낮은 산들을 등산하시며 늘 자연보호활동을 펼치셨다. 지금 통용되는`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개념을 들어 보신적은 없어도 사람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함을 몸소 느끼셨던 것 같다. 유기농 개념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 당시에도 화학비료 보다는 지력증진을 위해 퇴비를 써야 하고, 사과나 고추에 농약을 치지 않아야 껍질째 씹어 먹을 수 있음을 강조 하셨다.

우리나라에는 가나안농군학교나 새마을운동 이전인 70년 전에도 생태농업이나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을 추진하던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 당시에도 농촌계몽운동이나 4H운동이 맥을 잇고 있었다고 보아진다. 우리 동양사회의 전통적인 자연관 자체가 인간과 자연의 조화였음에도, 우리는 전쟁 통에 그리고 근대화과정 중에 이를 너무 잊고 살았던 것이다.

포항에도 경상북도수목원, 기청산식물원 등 자랑할 만한 수목원 내지 생태숲들이 있다. 그러나 좀 더 많은 수의 이러한 생태공원들이 도심 가까이에 자리 잡아 시민들이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