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탐사
다시 형산강에서…
(14) 안강평야의 젖줄, 칠평천과 옥산천

▲ 옥산천 계곡에서 바라 본 계정

안강평야를 관통하는 가장 큰 형산강 지류는 기계천이다. 하지만 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산지에서 발원해 형산강과 합류하는 두 개의 하천이 있으니 칠평천(七坪川)과 옥산천(玉山川)이다. 물론 자잘한 세류들이 있지만 이 두 개의 천이 가장 크고 많은 이야기들과 유적들을 품고 있다. 안강평야에 들어서면 크고 작은 산들은 평야를 감싸고 멀리 물러나 있다. 형산강 유역에 형성된 들판 중에서 가장 큰 평야를 형성하고 있으며, 한 눈에도 시원한 풍광이 이 일대의 곡창지대로 불릴만 하다고 하겠다. 경주시 현곡면 래태리의 금곡산에서 발원한 칠평천은 화산곡지와 하곡지 두 개의 큰 저수지를 형성한 후 28번 국도를 따라 흘러 안강읍을 안고서 흐른다. 그리고 7번 국도를 따라 흘러온 형산강과 합류하여 크게 휘돌아 나간다. 강은 지세와 산세를 따라 형성되고 흘러 간다.

칠평천 발원 금곡산엔 신라고승 원광법사 수도지 금곡사가 오롯이
회재 이언적 선생 자취 온전히 간직한 옥산서원·독락당도 만나


□ 하천의 유래가 주는 유용한 정보들

칠평천의 유래는 옥산천과의 관계를 먼저 살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 현재의 형산강이 옥산천을 합류시켜 동쪽으로 흐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때의 옥산천은 현재의 옥산천이 아니라 칠평천 전체를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그 표기에 있어서 두 하천이 옥산천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표기된 이유에는 영남학파의 거두였던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을 모신 옥산서원이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후 옥산천은 일제시대에 칠평천의 지류인 현재의 옥산천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채택되었다.

한편 칠평천의 유래는 하천 부근에 칠평마을이 있어 그 지명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일명 한천(寒川)이라고도 한다. 옛날 큰 홍수가 나서 안강 전역이 침수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칠평 정도의 땅이 물에 잠기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 물에 잠기지 않은 부분의 땅모양이 칠자형(七字形)이었다고 하여 그 넓이와 모양을 따서 칠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칠평천과 옥산천의 유래에서 옛날 이 일대의 지형과 역사적 인물에 대한 정보들을 이미 얻을 수 있다고 하겠다.

28번 국도를 따라 영천쪽으로 진행하다보면 안강읍내를 벗어나서 왼쪽으로 큰 저수지 하나를 만나는데 이곳이 바로 하곡지, 일명 딱실못이다. 하곡지는 하곡리에 위치한 못이라하여 지명에서 가져 온 것이고, 딱실은 인근의 두류2리 일대에서 닥나무로 종이를 많이 만들었다고 하여 닥나무 계곡, 즉 딱실이 되었다고 한다.

 

▲ 옥산서원 전경
▲ 옥산서원 전경

□ 산길 끝에서 만나는 원광법사의 자취

하곡지를 끼고 두류리로 들어서면 멀리 정면에 보이는 산이 바로 칠평천의 발원이 금곡산이다. 길 초입에 두류공단을 지나 두류리 마지막 동네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산기슭에 아담하게 파묻힌 저수지가 하나 나오는데 바로 화산곡지다. 이곳에서부터 비포장도로를 따라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길이 끊기고 절이 하나 나오는데 삼국유사의 현장이며 화랑의 세속오계의 가르침을 주신 신라의 고승 원광법사와 연관된 금곡사(金谷寺)다.

10여년 전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는 길도 변변치 않고 인적이 거의 없는 산길을 따라 올라갔던 기억이 있는데, 그 산길이 차 한 대가 쉽게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혀 졌을 뿐 심산유곡의 첩첩산중을 가고 있다는 느낌은 여전했다. 삼국유사에는 원광법사가 30세에 `안강 삼기산(三岐山) 금곡사(金谷寺)에 들어가 수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금곡산의 원래 지명은 삼기산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절 이름을 따서 금곡산이라 불렀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 때 금곡사를 건립한 것으로 나오며 당시 원광법사의 부도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탑의 근거에 대한 여러 이설이 있으나 삼국유사에서는 이곳에 원광법사의 부도탑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으니 원광법사의 자취가 서려있는 곳은 분명하리라.

 

▲ 금곡사의 원광법사 부도탑
▲ 금곡사의 원광법사 부도탑

□ 유학의 거두, 자연과 합일된 건축에 깃들다

옥산천은 온전히 회재 이언적의 자취와 함께 하는 곳이다. 그 지명의 유래는 선생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창건된 옥산서원과 관련이 있다. 옥산서원에서 조금 더 들어가서는 선생이 만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옥산천 시냇가에 자리를 잡고 거주처로 안채를 짓고 개울에 면하여 있던 사랑채 독락당(獨樂堂)과 정자 계정(溪亭)이 있으니 자연을 벗삼으며 약 6년간 성리학 연구에만 전념하였던 곳이다. 이러한 연유로 회재가 세상을 떠난 후 독락당에서 가까운 곳에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옥산서원이 창건되었다.

선조 6년인 1573년 창건된 옥산서원은 이듬해인 1574년 `옥산(玉山)`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이 전국 47곳의 서원을 제외한 나머지 서원을 철폐할 때에 훼철되지 않은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에 들를 때면 반드시 보고가는 것이 있으니 바로 강당 사면에 걸린 편액들이다. 먼저 강당 전면에 걸린 `옥산서원` 편액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이고, 강당 대청 전면에 있는 `옥산서원` 편액은 창건 당시 편액으로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글씨이며, `무변루`와 `구인당`의 편액은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글씨이다. 이 세 개의 편액으로도 옥산서원의 무게감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다. 조선시대 3대 명필 중에서 두 명의 편액이 강당에 나란히 걸렸다는 것만으로도 회재 이언적 선생의 유명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옥산서원에서 좀 더 올라간 곳에 위치한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이 정치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지은 집의 당호로 한옥과 자연의 어우러짐, 그리고 그 합일의 궁극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특히 계정은 하천에 놓인 자연암반 위에 가느다란 기둥을 세워 날렵한 모습으로 지은 것이다. 이곳의 풍광과 정취가 얼마나 수려하였으면 광해군때 노계 박인로가 독락당을 찾았을 때 회재를 그리며 이곳의 정경을 노래한 가사를 지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기도 한다.

 

▲ 김규형<br /><br />사진작가
▲ 김규형 사진작가

여기까지만으로도 풍성함이 있겠지만 독락당까지 갔다면 꼭 들렸다가 나올 곳이 인근에 있다. 바로 국보 제40호 `정혜사지십삼층석탑`이다. 정혜사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하는 것이 없으나 신라 선덕왕 원년인 780년 중국 당나라의 백우경이 신라에 망명와 이곳에 머무르면서 집을 지었는데 후에 이를 고쳐 절로 삼고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는 기록이 동경통지(東京通志)』에 남아 있다.

우리나라 탑들 중에서 10층 이상의 다층탑은 매우 드물다.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북한 묘향산 보현사에 남아 있는 13층 석탑을 제외한다면 정혜사석탑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이 절의 창건이 중국인과 연관이 있고 10층 이상의 다층탑은 중국적인 탑이니 전혀 무관치 않다고 하겠다. 지금은 폐사지에 석탑만이 우뚝 쏟아 있지만 그 옛날 절의 모습을 그리며 석탑을 둘러보고 나오는 것도 의미있는 답사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도심 근교에서 고즈넉한 계곡의 정취와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는 심산유곡의 한나절에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곳이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칠평천과 옥산천이 주는 또 다른 선물이기도 하다.

노계 박인로의 노계집 권3에 실린 `독락당(獨樂堂)`의 현역

자옥산 명승지에 독락당이 소쇄하단 소릴
들은 지 오래건만
이 몸은 무장으로서 해변을 지키는 일이 몹시 급하여
일편단심에 충의를 떨치느라
금쟁 철마로 여가가 없이 분주하다가
마음 속 사모하는 마음이 늙을수록 더욱 깊어
죽장망혜로 오늘에야 찾아왔으니
봉우리들은 수려하여 무이산이 되었고
흐르는 물은 빙빙 돌아 후이제가 되었도다. <생략>
 진실로 이 가르침을 마음속에 가득 담아
뜻을 정성스럽게 마음을 바르게 하여 넓게 닦으면
말은 참답고 행동은 독실하여 사람마다 어질게 되리라
선생께서 남긴 교화 지극하니 어떠한가
아, 후생들아! 더욱 추앙하여
천추 만년에 태산북두처럼 바르게 살아
높은 하늘과 두터운 땅도 다할 때가 있거니와
독락당의 맑은 풍모는 끝이 없을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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