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카리브 해에서 세계사의 전환을 알리는 횃불이 타올랐다. 지난 20일(현지시각) 쿠바와 미국의 국교가 재개(再開)되었다. 1961년 국교단절 이후 54년 만의 일이다. 쿠바 역사학자 에우제비오 레알은 공산당 기관지 `그라마` 인터뷰에서 “1961년 미국에서 내려졌던 쿠바 국기가 다시 올라가기까지 53년 11개월 18일을 기다렸다”고 술회(述懷)했다. 기나긴 세월이다.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작년 12월17일 국교 정상화를 전격적(電擊的)으로 선언했다. 지난 4월 파나마에서 열린 미주기구 정상회의에서 그들은 상호협력을 재확인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5월에 쿠바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고, 지난 1일 양국 대사관 재개설 협상타결을 공식 발표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쿠바와 미국의 단절된 국교가 재개된 것이다.

쿠바혁명은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라울 카스트로 같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무장투쟁(武裝鬪爭)을 통해 1959년 1월 1일 풀헨시오 바티스타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혁명을 말한다. 쿠바혁명은 1953년 7월 26일부터 시작되어 1959년 종결(終結)됨으로써 6년 가까운 세월을 필요로 하였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친숙한 체 게바라는 이때 피델 카스트로를 도와 혁명을 완수하게 되었다.

에스파냐의 오랜 식민지였던 쿠바는 1902년 이후 독립을 얻었지만 지정학적(地政學的) 위치 때문에 미국의 실질적인 지배 아래 있었다. 사탕수수를 주로 재배했던 쿠바의 토지는 미국 자본과 쿠바인 대지주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대다수 국민은 궁핍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었다. 독재정권의 부패(腐敗)도 심각하여 여러 차례 민중봉기가 일어났지만 미국의 비호(庇護) 하에 진압되었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바티스타 같은 불의(不義)하고 부정(不正)하며 타락(墮落)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쿠바공화국을 건설한 것이다. 미국은 쿠바혁명을 수용하지도 않았고, 카스트로 정권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당시 세계는 냉전(戰)을 경험하고 있었으며, 스탈린의 뒤를 이은 니키타 흐루쇼프는 쿠바의 공산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때 발생한 사건이 이른바 `쿠바 미사일 사태`였다.

제3차 대전의 위기가 목전(目前)에 다가왔고, 존 에프 케네디는 신속하고 단호하게 사태를 지휘 통제한다. 결국 흐루쇼프는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시키고, 1964년 10월 실각(失脚)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쿠바에 대한 소련의 비호는 1991년 소연방 해체 직전까지 지속된다. 미국이 지난 5월에야 비로소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쿠바를 해제한 것은 양국의 긴장과 대립관계가 얼마나 깊고 너른지 보여주는 사례다.

쿠바혁명을 완수한 이후 50년 세월 권좌(權座)에 있었던 피델 카스트로는 2008년 2월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권력을 이양(移讓)한다. 그리고 2011년 4월 완전히 은퇴를 선언한다. 쿠바혁명 이후 52년만의 일이었다. 하나의 시대가 끝난 것이다. 하지만 조지 부시 정권이 끈질기게 추진한 대 테러전쟁 여파(餘波)와 장기간에 걸친 미국의 봉쇄로 쿠바의 사회 경제적 여건(與件)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워싱턴에서 있은 쿠바 대사관 개관식에서 로드리게스 장관은 쿠바에 대한 미국의 경제제재(經濟制裁) 해제와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부지반환 등을 요구했다. 로드리게스 장관은 “봉쇄의 완전해제와 미국이 불법으로 점령한 관타나모 부지반환 등이 양국의 국교 정상화로 나아가는 데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앞으로 두 나라가 풀어가야 할 문제가 만만치 않음을 시사(示唆)해주는 대목이다.

이란 핵협상 타결과 함께 오바마의 외교적 승리가 현저하다. 구시대를 종식(終熄)하고 21세기 신시대를 열어가려는 강대국 지도자의 모습이 약여하다.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북한이다. 북한의 고립탈피와 국제외교 무대의 등장은 남북한 긴장완화와 평화통일로 가는 첩경(捷徑)이다. 우리가 북방외교로 중국, 소련과 수교하여 동북아시대를 연 것처럼 북한도 고립을 버리고 신질서에 과감하게 동참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