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환<br /><br />작가· (사)포항지역사회연구소장
▲ 이대환 작가· (사)포항지역사회연구소장

지난 16일 목요일 이른 아침. 포항 날씨는 태풍의 끝자락을 타듯 드센 바람이 잔뜩 찌푸린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일찍 숙소를 나선 나는 효자동 대중목욕탕으로 걸어갔다.

내가 옷장에 열쇠를 꽂았을 때, 목욕 후 옷을 입고 평상에 걸터앉은 두 노인이 `박태준`을 화제에 올렸다. 키 큰 노인이 보통 체구의 노인을 형님이라 불렀는데, 얼핏 던진 곁눈질에도 팔순을 바라볼 두 노인은 그러니까 `늙은 포철-맨`이었다.

“형님, 홋카이도 무로랑제철소 연수 시절이었는데요, 하루는 박태준 사장님이 와서 저녁에 우리 연수생들을 식당에 모았습니다.” 나는 얇은 잠바만 벗어 옷장 속에 걸어두고는 일부러 꾸물대고 있었다. 내놓고 엿듣기가 민망해서 잔꾀를 부린 것이었다.

키 큰 노인이 이야기를 이었다. “포철로 오기 전의 직장에서는 월급 6만원을 받았는데, 포철로 가면 해외연수 기회도 잡을 수 있다고 해서 옮겼더니, 포철에서는 월급이 4만5천원이대요. 25퍼센트나 줄었으니 마누라는 입이 튀어나왔지요.” 보통 체구의 노인이 한마디 끼어들었다. “그때 없던 살림에는 충격이 컸겠다.”

키 큰 노인이 쿡쿡 웃었다. “그날 저녁에 박 사장님이 술도 하자고 해서 제법 마셨는데, 건의가 있으면 하라고 해서, 내가 월급 얘기를 했어요.” “6만원 받았는데 4만5천원밖에 안 준다고?”“예에. 그랬더니, 북한에서 혼자 내려왔느냐고 물어요. 아니라고 했더니,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요. 울산 정자라고 했더니, 거기는 자기 외가라고 합디다. 그래서 모두가 웃었는데, 그 뒤에도 몇 사람이 이런저런 건의를 했어요. 박 사장님이 다 듣고 나서 자네, 자네, 하고 나를 포함해서 넷을 앞으로 불러내요.”

나는 천천히 양말 한 짝을 더 벗는 중이었다. “우리는 다 작업복을 입고 있었는데, 상의를 배꼽까지 들어 올려 보라고 해요. 영문도 모르고 긴장을 해서 그렇게 했더니, 모두 허리띠는 매고 있구나 하고는, 허리띠 칸을 최대한 줄여 보고 각자 몇 칸까지 줄여지는지를 말하라고 해요.” 보통 키의 노인은 듣고만 있고, 나는 양말 두 짝을 옷장 속에 넣었다.

“나는 네 칸, 내 옆에는 세 칸, 다른 둘은 두 칸을 줄였다고 발표처럼 했는데, 아, 그러자 그 양반이 아주 진지하게 이러는 겁니다. 우리는 자손들을 위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가자.” 문득 나는 박태준 어록의 한마디를 떠올렸다. `우리 세대는 다음 세대를 위해 순교자적으로 희생하는 세대다.` 평전 `박태준`을 쓴 작가로서 내 주인공은 빈말하지 않았다는 점도 새삼 아리게 확인했다.

“형님, 나는 그때 그 말씀과 그 장면을 평생 못 잊어요. 그거 참 가슴이 찡하더니만, 오래도 가네요.” 듣고만 있던 보통 키의 노인이 낮게 한탄을 했다. “그런데 이게 뭐고? 요새 회사를 보면 허파가 뒤집어진다.” 키 큰 노인이 발끈했다. “성진지오텍이다 뭐다, 무슨 수사가 뒷북만 친답니까?”“그러게. 포항 민심은 하나도 못 밝히면서 질질 끌어대며 회사 이미지만 자꾸 실추시키고.”

나는 속옷을 벗었다. 두 노인의 입에서 실명(實名)들이 튀어나왔다. 한때 권력을 쥐락펴락한다던 그 이름들을 육두문자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박 회장님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설 일이지. 어제 발표한 쇄신안들이 제발 잘돼야 할 건데.” 선배의 차분한 분노를 후배가 거칠게 받았다.“회사가 엉망이 되는 동안에는 새로 생기는 외주파트너사를 실세다 국회의원이다 뭐다 그 똘마니들이 여러 개 먹었다고 하잖아요? 회사의 빽이 돼준답시고 그 빨대에서 빼낸 돈으로 공천권 가진 것들한테 줄을 대고는 공천 받는다, 무얼 해먹는다, 분수도 모르고 설쳐댄 놈들도 있었잖아요? 그 난장판에 얼굴마담이나 해준 OB들도 없지 않았고요. 쇄신을 확실히 하자면 그런 빨대들도 솜씨 좋게 뽑아버려야지. 형님, 안 그래요?”

나는 발을 옮겼다. 발가벗은 몸으로는 차마 나를 소개하고 성함을 여쭐 수가 없었다. 한산한 목욕탕의 둥그런 열탕에는 혼자였다. 어느 순간에 `야속한 운명인가, 고운 순정 보람 없이`로 시작하는 노래 `백치 아다다` 2절을 쓸쓸히 부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