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소통(疏通)`이 오늘날처럼 각광받은 시기는 일찍이 없었다. 그만큼 온전하게 소통하는 것이 어렵다는 반증(反證)이다.

소통의 사전적 의미는 “막힌 것이 트여 서로 통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소통되지 않는다 함은 쌍방에 막힌 것이 있거나, 어느 일방만 통하는 상황이라 할 것이다. 쌍방 모두 내면에 아무 막힘도 없음을 확인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는 경우 소통이 가능하다.

예외도 있지만, 자고이래로 말은 소통의 첫 번째 수단으로 기능해왔다.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함의(含意)를 갖는다. 정보전달에서 사소한 감정표출에 이르기까지 말의 영역은 무한대로 확산한다. 문제는 발화(發話)된 말이 수신대상에게 얼마나 올바르고 적시(適時)에 전달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말을 곡해(曲解)하거나, 절실한 시간대를 지나 수신하는 경우 말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다.

교육을 업으로 삼고 있는지라, 학부모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왕왕 있다. 상당수 학부모가 자녀들과 대화하기 어렵다고 토로(吐露)한다. 쓸모 있고 가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줘도 시큰둥하다는 것이다. 부모는 절실한데, 자식들은 무심하거나 냉담(淡)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부모와 소통하는 것이 달갑지 않다는 학생들도 적잖다. 물론 아무런 어려움 없이 부모자식 간의 소통에 도달하는 경우도 많다.

소통하기 어려워하는 부모에게 나는 묻는다. “자녀 말을 얼마나 많이 들으세요?”나이든 세대는 소통의 개념을 오해(誤解)하고 있다. 자식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전달하는 것으로 소통을 이해한다. 그러니까 자식과 한 시간 대화한다면, 부모는 50분 이상의 대화시간을 독점(獨占)한다. 설령 자식에게 말할 기회를 준다 해도 거기에 귀 기울이고 이해하는 자세를 보이는 부모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소통의 가장 중요한 첫 단추는 경청(傾聽)이다. 목을 기울여 상대방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는 것이 경청이다. `청`이라는 한자어에는`귀가 왕(王)이 되는 미덕`이란 뜻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의 말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주의 깊게 들어준다는 의미가 듣는 행위다. 듣는 일은 생각보다 매우 어렵다. 하물며 상대의 말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챙겨 듣는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외 없이 듣기보다는 말하기에 익숙해있다. 여러분 주위를 돌아보시라. 말하는 자는 많고, 귀 기울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사적(私的)인 공간이든, 식당이나 영화관 같은 공공장소든 한국인들은 말하느라 분주하다. 하지만 그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문제는 그런 심각한 상황을 어느 누구도 인지(認知)하지도 않을뿐더러,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말의 요체(要諦)가 소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껄여대는 것에 있다고들 생각한다. 그래서 말은 많은데, 소통은 안 되는 것이다. 부모자식 간 대화에서 소통은 더욱 어렵다. 마이크 잡은 부모가 일방적인 훈계(訓戒)로 시작해서 방송을 끝내기 때문이다. 그런 부모는 자랑스럽게 말한다.“나만큼 자식들하고 소통 잘하는 사람도 없죠!”그것은 소통이 아니라, 폭력이다. 그것도 가공(可恐)할 언어폭력이다.

자식의 영혼과 육신을 괴롭혀놓고 하는 말이 `소통했다`는 것이다. “말하고자 하면 먼저 들어야 한다!” 이것이 나의 결론이다. 부모문제로 자식과 얘기하는 부모는 별로 없다. 자식문제가 화제(話題)의 중심이다. 그러면 자식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왜 괴로워하고 우울한지 알아야 한다. 따라서 자식의 마음을 열게 하고 그것이 발화되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야 하는 것이 순서 아닌가!

자식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부모라면 자식들이 말할 수 있는 분위기(雰圍氣)를 먼저 만들어줘야 한다. 자식들이 스스럼없이 내면을 토로하고 고민을 상담(相談)할 수 있는 부모가 되기란 상상 이상으로 어렵다. 그것은 언제나 귀를 열어두고 자신의 입은 봉쇄(封鎖)해야 가능하다.

소통의 제1과 제1장은 말하고자 하는 욕망(慾望)은 최대한 누르고, 들으려는 의지(意志)는 하늘 끝까지 확장하는 것에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