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서 삼척·영덕·포항·감포 대왕암까지
⑾ 대왕암 바닷바람에 말린 연한 오징어 맛

▲ 신라 제30대 문무대왕의 수중릉(水中陵)으로 지정된 사적 제158호 대왕암 해수욕장. 바닷가에서 관광객들이 도시락을 펼치고 있다.
▲ 신라 제30대 문무대왕의 수중릉(水中陵)으로 지정된 사적 제158호 대왕암 해수욕장. 바닷가에서 관광객들이 도시락을 펼치고 있다.

아침 9시 30분. 포항~구룡포의 14번 국도를 따라, 감포읍 양북면 대왕암을 향했다. 연분홍 자귀꽃 우거진 아름다운 산길이다.

푸른 바닷길이 나타난 것은 한 시간 후. 곧이어 검붉은 바위돌 무더기가 펼쳐진다. 대왕암이다. 신라(新羅) 제30대 문무대왕의 `수중릉(水中陵)`으로 알려지고 있는 사적 제158호의 모습이다.

문무대왕 `수중릉` `일본망명설` 등
현재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감은사 터 삼층석탑
거침없는 남성적 매력 발산
불국사 석가탑과 쌍벽 이뤄

대왕암 바라보는 정자 이견대도

해수욕 시즌도 아닌데, 벌써 모래밭에는 도시락을 펴고 있는 관광객도 더러 보인다. 파도소리와 함께 바닷바람이 풍겨온다.

바닷가 식당 주면에는 오징어·미역·다시마 장수 아줌마들이 진치고 있다. 대왕암 바닷바람에 말렸다는 부드러운 피데기(덜말린 오징어) 여섯장을 1만3천원에 샀다. 지나가는 관광객이, `비싸다`, `오징어도 대왕값이다`며 야유한다.

 

▲ 감포 대왕암 바닷가에서 오징어를 팔고 있는 아낙네들.
▲ 감포 대왕암 바닷가에서 오징어를 팔고 있는 아낙네들.

대왕암이 `수중릉` 또는 `경주 문무대왕릉`이라 불리는 까닭은, 문무대왕이 이 바다 속 바위 밑에 매장 되었을 것이라는 사학자들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여러차례에 걸친 조사 결과, 바위 밑에는 어떠한 무덤 장치도 없다는 것이 밝혀짐으로써 `왕릉설(王陵說)`은 일단 자취를 감춘 형편이지만, 아직도 일부 학자들은 수중릉(바다 속에 세워진 왕릉)설을 고집하고 있고, 정부 당국에서도 `경주 문무대왕릉`이라 호칭하고 있다.

 

▲ 감은사 삼층석탑(국보 제112호)을 바라보고 있는 관광객들.
▲ 감은사 삼층석탑(국보 제112호)을 바라보고 있는 관광객들.

그러나 문무대왕은 돌아간 후 곧바로 화장(火葬)되었고, 그 재를 일부 이 대왕암 바위 위에 뿌려 제사지냈다고 알려져 있으므로, 문무대왕과 전혀 관계 없다고는 하지 못할 듯하다.

특히 문무대왕에게는 오래 전부터 `일본 망명설`이 제기되어 오고 있어, 이 부분을 명확히 밝히지 않는 한, `문무대왕의 수수께끼`는 말끔히 풀기 어려울 것이라 한다.

일본 왕가(王家)의 역사에는 `문무천황(文武天皇)`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등장한다. 서기 697년에 왕위에 올라, 서기 707년까지 10년간 집권, 78세에 생을 마감한 임금이다.

 

▲ 감은사(感恩寺) 터와 국보 제112호 삼층석탑
▲ 감은사(感恩寺) 터와 국보 제112호 삼층석탑

일본 최초의 법율집 대보율령(大寶律令)을 제정했고, 일본 최초로 대학(大學)을 두었고, 일본 최초로 도량(度量)을 만들어 백성에게 나누워 주었고, 험한 산길을 열어 백성을 도왔으며, 무쇠 광맥(鑛脈)을 열어 얻은 무쇠조각들을 서라벌에 보내 신라를 돕기도 했던 문무천황. 그가 바로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천황이 된, 문무대왕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글은, 필자가 일본에서 펴내고 있는 격월간 잡지 `마나호(`진실`이라는 뜻의 일본어)`에 만 15년간에 걸쳐 집필해 왔다. 기회가 있으면 우리말로 옮겨 보고자 한다.

 

▲ 대왕암을 바라보고 있는 이견대(利見台).
▲ 대왕암을 바라보고 있는 이견대(利見台).

대왕암을 내려다보는 해안 들판에 건축된 두개의 삼층 석탑은 국보 제112호. 지금은 모습을 볼 수 없는 감은사(感恩寺) 마당에 세워져 있다. 보는 이를 압도하듯 거침없는 힘을 느끼게 하는 이 탑은, 장중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과 함께 쌍벽을 이루고 있는 조형물이다.

석가탑이 세련된 정제함을 지니고 있는데 비겨, 감은사 삼층탑은 거침없는 남성적 힘을 느끼게 한다고나 할까. 바닷가 파도와 잘 어울리는 탑이다.

대왕암 이웃 모래밭에 세워진 이견대(利見台)는 대왕암을 바라보는 언덕위에 지어진 정자다.

 

▲ 이영희 교수
▲ 이영희 교수

문무대왕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은, 대왕암이 잘 보이는 자리에 이 정자를 짓고, 죽어서 용이 된 문무대왕의 심부름꾼이 오기를 이곳에서 기다렸다고 전해진다.

신문왕이 세운 이견대는 없어졌으나, 1970년 발굴로 건물터를 확인, 신라의 건축양식으로 다시 지은 것이라 한다.

<끝>

/글·이영희(작가·전 포스코인재개발원 교수) 사진·이창훈(명스튜디오) 캘리그래피·제일커뮤니티

    글·이영희(작가·전 포스코인재개발원 교수)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